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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성마령,청옥산.남병산.장암산51

단석 2013. 8. 1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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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성마령,청옥,남병,장암산51.gpx





정선터미널----강변길----용탄면 용탄1교----행매동----가리왕산 제4코스 또는 정승구덩이 옛길----성마령----청옥산 임도----청옥산

청옥산 싱글----청옥산 임도----남병산 임도----장암산----장암산 패어글라이딩----장암산 싱글다운----평창----평창 터미널



성마령-------정선읍 용탄3리 와 평창군 미탄면의 경계에위치하여 옛 선인들이 걸어서넘나들던 해발 979 M의 산등성이다..

                    고개가 너무 높아 별를 만질수 있을 정도라 하여 성(星)마령이라 하였다

                   옛문헌에도 나와있지만 이 성마령은 정선지역의 관문으로 정선에서

                   평창 .미탄 원주 멀리 한양이라고 하는 서울을 가기위해서는 이 성마령을 꼭~넘어야 하는 관문이자 지름길이였다..                           

                       자료로 보면 懶隱先生文集 (고종17년 1880년 )또 九畹先生文集(1571~1634 약 441년)九畹先生( 李春元)

                     企齋集 企齋申光漢(1484~1555) 약528년 의 時文集등 조선왕조 500여년이 넘는 유래가 깊은 고갯길이라고 하는 성마령.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재(松齋) 이우(1469~1517)가 쓴 ‘관동행록’에 성마령이라는 시가 남았다.

그는 늦은 가을의 해거름에 고개를 넘었던 모양인지



성마령


 “평창 동쪽에 큰 고개가 솟았는데

 고갯마루에서 가히 별을 만질 수가 있구나.


 말발굽은 소나무 가지 끝을 타고 오르고 

하늘의 은하수는 계류와 같이 뻗쳤도다. 

바람에 시달린 나무는 일찌감치 잎을 떨구고 

구름과 맞닿아 눈보라조차 덮어썼구나. 

 

골짜기에는 해거름인가 하면 어느덧 밤이 닥치고 

고개 돌려 바라보니 걸어 온 길이 아득하다”


적색선 = 성마령 옛길


 

성마령 가는 길옆에서 특이한 묘를 발견하게 된다.구덩이 묘라는 것이다(다음설명문을 참고하기바람)


 




정선읍 용탄3리(행매부락)에서 동남쪽으로 옛날 정선의 관문인 성마령(해발979m)옛길을 따라
1.7km에 오르면 신기한 묘가 있다. 보통 묘와 달리 지표면에서 약15m 사다리 원통형 깊이의 구덩
이 바닥에 묘(비석포함)가 있으니 이상하기 그지없다.
봉분이 있는 구덩이는 깊이가 약15m 되고, 바닥의 직경은 약14m, 묘의 상부 가장자리 둘레의 직경
은 약40m로서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구덩이 외부 둘레에 접한 곳에는 거북이와 흡사한 바위(높이90cm, 길이2.7m, 넓이1.9m)가 머
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구덩이 안에 있는 묘의 정면(동남쪽)25m 지점에 구덩이 안에 있는
묘와 상태가 비슷한 묘비가 있다


구덩이 안에 있는 묘는 고려문화시중평장사를 지낸 전우화(全遇和)公의 묘이고, 구덩이 밖에 있
는 묘는 고려 문충보절 보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좌참찬을 지낸 전우화의 장남  전분(全賁)의 묘로서

 아버지(전우화)묘는 구덩이 안에 있고, 아들(전 분)묘는 구덩이 밖에 있는 부자지간 묘임을 확인된다



삼현실기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뜻있는 선비 7인(전
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 중 한사람으로 고려 예문관 응교 진현관 대제학 전법판서를 지냈으며

정선 전씨 중시조인 채미헌(호) 전오륜은 전우화(全遇和)공의 장손임을 알 수 있었다.



□ 전정승혈(전우화 묘)의 전설

고려 문화시중 평장사를 지낸 전우화 공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왕조로부터 화를 피하기 위하여 심심산중에 은거 하고자
장남 분을 비롯한 둘째 순과 셋째 승 그리고 맏며느리(안동권씨)와 함께 몇날며칠을 두고 정선을 찾아오던 중
 노구의 몸을 이끌고 험난한 정선의 관문인 성마령을 넘으면서
과로에 지쳐 지금의 정선읍 용탄3리 행매부락에 잠시 머물기로 했지만 그대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우화공의 장남 분과 두 동생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산전을 일구어 농사라도 지어야 할 형편이
 매일 같이 산전을 일구고 씨앗을 파종하여 머루랑 다래랑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이든지 구해야 했다.

하루는 장남 분의 처인 안동권씨가 남편과 시동생이 일하는 메밀밭에 점심을 가져다주고 빈 그릇을 챙기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노승이 쓰러져 있음을 목격하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스님께 연유를 물어본즉 노승께서는 허기에 지쳐 기운을 차릴 수 없다고 하자,
 안동권씨는 난감하기 이를 때 없었다. 주변에 사람도 없을뿐더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빈 그릇뿐........
그렇다고 아사직전에 있는 행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터라
 생각 끝에 돌아 앉아 혈기왕성한 젊은 때라 자신의 젖을 종지에 짜 담아 노승에게 먹였더니 잠시 후 정신을 차리므로
 안동권씨는 노승을 요기라도 시키기 위해 자기집으로 모시고 왔으나 그때 병석에 누웠던 아버님 전우화 공께서 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돌아가신지 삼일만에 우화공의 아들 삼형제는 장사를 치르기 위해 우화공의 시신을 모시고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노승께서는 목숨을 건져 준 보은의 대가로 소승이 묘지를 잡아주겠다고 간청하기에
 아들 삼형제는 노승과 함께 묘지를 잡으로 성마령 산하를 답사한 바,
노승께서는 지금의 묘 터(전정승구덩이)를 가리키며 이곳이 명당입니다.
이곳에 안장하면 후손이 높고 귀하게 되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승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즉 이곳에 땅을 석자 정도 파면 암반이 나올 것이니 암반을 일구지 말고 암반위에 그대로 하관하
본 소승이 성마령(묘지에서500m정상)을 넘어가거든 하관 하십시오. 꼭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당부하고 노승은 성마령 쪽으로 사라졌다.

노승을 보낸 후 하관을 하기 위해 삼형제는 광중을 파내려 가니 노승의 말대로 암반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맏상주 분(賁)은 노승이 시킨대로 암반위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하려 하였으나,
순과 승의 두 동생은 암반위에 어떻게 모시느냐고 암반을 파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형제간 언쟁이 벌어지자
성미 급한 막내 동생 승이 암반을 일구어 내자 난데없는 왕벌 3마리가 쏜살 같이 튀어나
한 마리는 왕대곡 쪽으로 한 마리는 변방산 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성마령 쪽으로 날아가 성마령 고개를 막 넘으려하던 노승을 쏘아 즉사시키고 말았으니
 이는 노승이 천기를 누설한 보복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전우화 공의 묘소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깊이 15m 묘소 언저리 40m가 사다리 원통형으로 내려 않고
묘소 언저리 옆에 거북모양(높이 90cm, 폭 1.9m, 길이 2.7m)의 바위가 자리하니 후손들은 기이하게 여기며 이를 영구암(靈龜岩)이라 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 묘소를 전정승구덩(全政承穴)이라 부르고 있다.

□ 전우화(全遇和) 公의 묘지 관리 실태
우화공의 최후 행적은 물론 묘지를 실전(失傳)하였으나, 사적인 동국여지승람에서 공이 정선 출신이며
 목은(牧隱)선생께서는 중지설(仲至說)에서
전씨는 정선의 명망 높은 가문임을 밝히고 있는 것과
정선 전씨 을묘보(乙卯譜:1795년)의 기록과 후손과 동리 고노(古老)들의 증언을 참고로 현재의 묘(전정승구덩이)가 공의 유택임을 확인하고
乙亥년(1935년) 묘역을 개수하고 위토도 마련하여 매년 제향을 해오던 중
 1973년 불성실한 후손이 위토를 몰래 매각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위토===== 종토, 位土  ----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사항들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

위토는 주로 논과 밭으로서 각각 위토답(位土沓)·위토전(位土田) 또는 위답(位沓)·위전(位田)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며,

이따금 임야도 그 수익이 제사 경비에 충당하가도 한다 )


그러나 그동안 위토를 소작하였던 심성착한 이모씨가 몇 년간 벌초와 제향을 받들다가 궁핍한 생
활을 면하기 위하여 인근 평창으로 이사하여 지금은 부자가 되었는바, 이를 두고 동리 사람들은 우화공의 보살핌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본 묘소의 위선사업추진위원장인 전성용씨의 주관으로 비와 석물을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비문에는 후일에 관광명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새겨져 있다.

□ 전우화 공의 묘소에 얽힌 이야기
전우화 공의 묘(전정승구덩이)는 지하 15m의 구덩이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아 신기하다고 하나,
묘지 지하부에 석회석 동굴이 형성되어 있어 물이 잘 빠지므로 물이 고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사료되며,
전설에 광중을 파던 중 암반을 일구어 내자 묘지가 15m 깊이로 내려앉았다고 한 것은
묘지 지하가 동굴이기 때문에 암반을 건드리므로 연결된 지층과 함께 내려앉은 것으로 추정 된다.

전설 속에서 전우화 공의 시신을 묻기 위한 광중에서 암반이 나와 그것을 일구어 내자 왕벌 3마리가 튀어 나왔다고 하였는데,
 2008년 9월 11일 성마령 정상에 옛날 정선의 관문을 알리기 위한 표석으로 비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하기 위해
정선문화원 회원 등 150여명이 전우화 공의 묘지 옆을 지나 성마령 옛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왕벌 떼가 출몰하여 기관ㆍ단체장 등 10명이 벌에 쏘여 병원으로 후송하는 등 제막식 행사에 차질을 가져왔던 사건이 있었다.


동리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성마령내에 크고 작은 행사나 토석을 다루려면 전우화 공의 묘소에 예의를 갖추어야 무사하다고 하는데
이날 왕벌이 출현한 것도 우화 공의 하관시 나타났던 벌과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 든다.

이 외에도 병을 고치고 아들을 얻고 소원성취를 위하여 본 묘소에 잔을 올리는 등 예의를 갖추면 모두 해결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선의 옛 관문인 성마령은 우마차가 다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원님들이 울고 왔
다 울고 갔다는 애환을 연상키에 충분하며,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시 여정의 피로를 풀기위해 투숙
하였던 원(행마원)터와 당시 이용했던 샘터의 흔적도 그대로 있으며, 성마령을 소재로한 정선아리랑 가사도 전해지고 있다.

 

 

2--가리왕산 4코스 임도에서 성마령가는길




성마령 능선


3---나무사다리



5---도보 성마령들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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