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터미널----강변길----용탄면 용탄1교----행매동----가리왕산 제4코스 또는 정승구덩이 옛길----성마령----청옥산 임도----청옥산
청옥산 싱글----청옥산 임도----남병산 임도----장암산----장암산 패어글라이딩----장암산 싱글다운----평창----평창 터미널
성마령-------정선읍 용탄3리 와 평창군 미탄면의 경계에위치하여 옛 선인들이 걸어서넘나들던 해발 979 M의 산등성이다..
고개가 너무 높아 별를 만질수 있을 정도라 하여 성(星)마령이라 하였다
옛문헌에도 나와있지만 이 성마령은 정선지역의 관문으로 정선에서
평창 .미탄 원주 멀리 한양이라고 하는 서울을 가기위해서는 이 성마령을 꼭~넘어야 하는 관문이자 지름길이였다..
자료로 보면 懶隱先生文集 (고종17년 1880년 )또 九畹先生文集(1571~1634 약 441년)九畹先生( 李春元)
企齋集 企齋申光漢(1484~1555) 약528년 의 時文集등 조선왕조 500여년이 넘는 유래가 깊은 고갯길이라고 하는 성마령.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재(松齋) 이우(1469~1517)가 쓴 ‘관동행록’에 성마령이라는 시가 남았다.
그는 늦은 가을의 해거름에 고개를 넘었던 모양인지
성마령
“평창 동쪽에 큰 고개가 솟았는데
고갯마루에서 가히 별을 만질 수가 있구나.
말발굽은 소나무 가지 끝을 타고 오르고
하늘의 은하수는 계류와 같이 뻗쳤도다.
바람에 시달린 나무는 일찌감치 잎을 떨구고
구름과 맞닿아 눈보라조차 덮어썼구나.
골짜기에는 해거름인가 하면 어느덧 밤이 닥치고
고개 돌려 바라보니 걸어 온 길이 아득하다”
적색선 = 성마령 옛길
성마령 가는 길옆에서 특이한 묘를 발견하게 된다.구덩이 묘라는 것이다(다음설명문을 참고하기바람)
정선읍 용탄3리(행매부락)에서 동남쪽으로 옛날 정선의 관문인 성마령(해발979m)옛길을 따라
1.7km에 오르면 신기한 묘가 있다. 보통 묘와 달리 지표면에서 약15m 사다리 원통형 깊이의 구덩
이 바닥에 묘(비석포함)가 있으니 이상하기 그지없다.
봉분이 있는 구덩이는 깊이가 약15m 되고, 바닥의 직경은 약14m, 묘의 상부 가장자리 둘레의 직경
은 약40m로서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구덩이 외부 둘레에 접한 곳에는 거북이와 흡사한 바위(높이90cm, 길이2.7m, 넓이1.9m)가 머
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구덩이 안에 있는 묘의 정면(동남쪽)25m 지점에 구덩이 안에 있는
묘와 상태가 비슷한 묘비가 있다
구덩이 안에 있는 묘는 고려문화시중평장사를 지낸 전우화(全遇和)公의 묘이고, 구덩이 밖에 있
는 묘는 고려 문충보절 보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좌참찬을 지낸 전우화의 장남 전분(全賁)의 묘로서
아버지(전우화)묘는 구덩이 안에 있고, 아들(전 분)묘는 구덩이 밖에 있는 부자지간 묘임을 확인된다
삼현실기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뜻있는 선비 7인(전
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김위)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 중 한사람으로 고려 예문관 응교 진현관 대제학 전법판서를 지냈으며
정선 전씨 중시조인 채미헌(호) 전오륜은 전우화(全遇和)공의 장손임을 알 수 있었다.
□ 전정승혈(전우화 묘)의 전설
고려 문화시중 평장사를 지낸 전우화 공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왕조로부터 화를 피하기 위하여 심심산중에 은거 하고자
과로에 지쳐 지금의 정선읍 용탄3리 행매부락에 잠시 머물기로 했지만 그대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우화공의 장남 분과 두 동생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산전을 일구어 농사라도 지어야 할 형편이라
하루는 장남 분의 처인 안동권씨가 남편과 시동생이 일하는 메밀밭에 점심을 가져다주고 빈 그릇을 챙기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다고 아사직전에 있는 행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터라
돌아가신지 삼일만에 우화공의 아들 삼형제는 장사를 치르기 위해 우화공의 시신을 모시고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즉 이곳에 땅을 석자 정도 파면 암반이 나올 것이니 암반을 일구지 말고 암반위에 그대로 하관하되
당부하고 노승은 성마령 쪽으로 사라졌다.
노승을 보낸 후 하관을 하기 위해 삼형제는 광중을 파내려 가니 노승의 말대로 암반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전우화 공의 묘소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깊이 15m 묘소 언저리 40m가 사다리 원통형으로 내려 않고
□ 전우화(全遇和) 公의 묘지 관리 실태
우화공의 최후 행적은 물론 묘지를 실전(失傳)하였으나, 사적인 동국여지승람에서 공이 정선 출신이며
(위토===== 종토, 位土 ----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사항들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
위토는 주로 논과 밭으로서 각각 위토답(位土沓)·위토전(位土田) 또는 위답(位沓)·위전(位田)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며,
이따금 임야도 그 수익이 제사 경비에 충당하가도 한다 )
그러나 그동안 위토를 소작하였던 심성착한 이모씨가 몇 년간 벌초와 제향을 받들다가 궁핍한 생
활을 면하기 위하여 인근 평창으로 이사하여 지금은 부자가 되었는바, 이를 두고 동리 사람들은 우화공의 보살핌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본 묘소의 위선사업추진위원장인 전성용씨의 주관으로 비와 석물을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였다.
□ 전우화 공의 묘소에 얽힌 이야기
전우화 공의 묘(전정승구덩이)는 지하 15m의 구덩이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물이 고이지 않아 신기하다고 하나,
전설 속에서 전우화 공의 시신을 묻기 위한 광중에서 암반이 나와 그것을 일구어 내자 왕벌 3마리가 튀어 나왔다고 하였는데,
동리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성마령내에 크고 작은 행사나 토석을 다루려면 전우화 공의 묘소에 예의를 갖추어야 무사하다고 하는데
이 외에도 병을 고치고 아들을 얻고 소원성취를 위하여 본 묘소에 잔을 올리는 등 예의를 갖추면 모두 해결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선의 옛 관문인 성마령은 우마차가 다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원님들이 울고 왔
다 울고 갔다는 애환을 연상키에 충분하며,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시 여정의 피로를 풀기위해 투숙
하였던 원(행마원)터와 당시 이용했던 샘터의 흔적도 그대로 있으며, 성마령을 소재로한 정선아리랑 가사도 전해지고 있다.
2--가리왕산 4코스 임도에서 성마령가는길
성마령 능선
3---나무사다리
5---도보 성마령들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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