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길

영월------------------------신림역~단종유배길~영월터미널67,75

단석 2014. 9. 12. 00:58

 

 

 

영월-신림역~_단종유배길~영월역67.gpx                 

 

 

 

신림역--싸리치재(옛길)--황둔--솔치재 옛길--어음정--주천--단종쉼터--군등치--한반도면--방울재--

 

한반도지형관람대--배일치옛길--옥녀봉--선돌--장릉--청령포--영월터미널====67 km

 

 

 

 

 

 

 

 

 

영월-신림역~단종유배길~영월75.gpx                    

 

 

 

신림역--싸리치재(옛길)--황둔--황둔천--서만이강--수주면--주천면--단종쉼터--군등치--한반도면--방울재--한반도지형관람대--배일치옛길--

 

옥녀봉--선돌평창강가--청령포--장릉--영월터미널====75 km

 

 

 

역사에서 단종은 제3자였다. 단적으로 정치적 야심의 희생양이다. 단종은 1441년에 태어나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에게 왕의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1455년에는 상왕이 되었다.

이듬해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1457년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해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는 바람에 단종은 서인이 되었고,

결국 유배에 오른 뒤 4개월 만인 10월에 사약을 받는다. 1698년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으로 결정하면서 243년 만에 왕이 되었다.

역사에 남긴 단종의 행적은 보잘것없지만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는 깊고 진하다. 그 짧은 삶이 설화로 구전되면서 새로운 삶을 이끌어 냈다. 단종의 여정은 서울에서 영월까지의 유배길, 영월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신격화라는 세 과정으로 나타난다.

유배길은 목마름과 숨가쁜 고갯길에 남아 있다. 지나치는 길의 특성 탓인지 정돈된 이야기보다는 단편적인 지명유래로 전한다.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두둔마을의 어수정은 단종이 물을 마신 우물이고,

원주로 향하는 고개인 행치는 임금이 행차한 고개라는 의미를 가졌다.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의 느티나무는 단종이 쉬어가던 곳이고,

영월군 신일리의 물미마을은 물을 마신 곳이다.

또한 영월군 서면 신천리의 군등치와 방울재는 힘들게 넘던 고갯길이고,

광전리의 배일치는 단종이 고개를 넘다가 지는 해를 향해 절을 했다는 유래가 전한다.

 

 단종의 유배길은 서울에서 여주, 원주 그리고 영월로 이어졌다. 지명에 남아 있는 목마름과 고행에서 백성들이 단종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았는가를 되새길 수 있다.

 

 

유배길은 통곡의 길(솔치고개∼주천 10.5㎞), 충절의 길(주천∼배일치 마을 17㎞), 인륜의 길(배일치 마을∼청령포 15.5㎞) 3개 코스다.

 

 단종은 원주와 맞닿은싸리재를넘고 솔치고개 우물에서 목을 축인다. 후대에 어음정(御飮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우물을 지나 군등치(君登峙)에 닿는다.

 단종이 오르다 하도 힘들어 고개 이름을 물으니, 호송 관리가 “임금이 오르는 고개이니 군등치라고 하죠”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단종의 발걸음은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 인근의 방울재로 이어진다. 단종이 타고 가던 말에서 방울이 떨어져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 지형은 2000년대 초에 발견돼 이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전국의 사행천에 한반도와 유사한 형태의 지형이 여럿이지만, 그중 원조이자 가장 실물에 가깝다고 대접받는 게 영월의 한반도 지형이다.

배일치(拜日峙)는 단종이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절을 했다는 고개다.

 이어 유배길은 서강을 따라 옥녀봉과 선돌을 지나 청령포로 이어진다.

옥녀봉은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해 보이는 바위로, 단종이 어여쁘고 정갈한 정순왕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암봉이 갈라진 선돌.
옥녀봉을 지나 서강변의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또 다른 절경인 선돌로 이어진다. 높이가 70m에 달하는 선돌은 원래 하나였던 암봉이 지각변동으로 둘로 쪼개지며 우뚝 선 모양이 되어 선돌(立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돌 전망대에 오르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옥녀봉으로부터 단종이 걸어온 구불구불한 외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어붙은 서강이 하얀 눈으로 덮여 이 일대는 더욱 아스라한 풍경을 빚어낸다.

단종 유배길의 종착점은 청령포. 명승 제50호인 청령포는 삼면이 강이고, 나머지 한 면은 육육봉이라는 절벽이다. 유배지로 이만 한 데가 없었을 것이다. 이 절벽 위에 단종이 한양 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와 아내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이 있다. 청령포 단종어소 주변에는 700여그루의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 중에는 국내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는 관음송(30m)이 서 있다.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보고(觀), 단종의 절규를 들었다(音)고 해서 관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령 600여년의 노송이다. 단종어소 바로 앞에 서 있는 소나무도 형상이 특이하다. 가지가 하늘이 아니라 어소를 향해 뻗어, 마치 어린 임금을 배알하듯 허리를 굽힌 모습이다.

청령포에 머물던 단종은 두 달 만에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긴다. 홍수로 청령포가 잠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얼마 후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고 결국 단종에게도 사약이 내려진다. 이때가 유배 온 그해 음력 10월 24일이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을 때 금성대군이 주도한 복위운동이 또 다시 발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금성대군은 사사되었고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감봉되었습니다.
때마침 홍수에 청령포가 침수되어 단종은 영월 관아인 관풍헌에 나와 있었답니다.
그러나 관풍헌 생활도 잠시,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영월을 찾아옵니다.
사사하라는 명을 받들고 찾아왔건만 감히 처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금부도사를 수행했던 나장이 발을 굴렀다고 합니다.        결국 노산군은 모시던 통인이 자신이 하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섰답니다.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 노산군 목에 걸고 창밖에서 줄을 잡아 당기자     목이 졸린 17세의 소년은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시신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합수부 근처 모래밭에 버려지고  '죄인의 시신에 손을 댄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에 백성들은 떨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결행한 사람이 있었으니, 호장(현재의 이장) 엄홍도였습니다.
그는 야음을 틈타 시신을 암매장하고 고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노산군의 묘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갑니다.
세월이 흘러 1698년(숙종2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되고    잡초에 묻혀 있던 묘가 장릉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 길이 없어 풍설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群吏(군리)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있었다.

 임금은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후부터는 군수가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웠고.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습니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고.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고 합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맘같아야 울어 밤길 예놎다

                                                                                왕방년

 

 

영월-신림역~단종유배길~영월75.gpx
0.6MB
영월-신림역~_단종유배길~영월역67.gpx
0.29MB
영월-신림역~단종유배길~영월60.gpx
0.59MB
영월-신림역~ 단종유배길~영월역67.gpx
0.2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