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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영평8경43

단석 2016. 3. 1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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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댐 =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 701   백로주유원지      대충 43 km


제 7 경 백로주 유원지 출발 --  제 4 경 낙귀정지 --  포천 영송리 선사유적지 --  제 2 경 금수정 --  창옥굴 --  제 3 경 창옥병 -- 


아우라지 베개용암 (연천 신답리고분) --  주원리 --  거사리 -- 제 8 경 청학동 --   원점도착



영평 8경의 현황     ----     제 1  경  ---  화적연
                                     제  2  경  ---  금수정
                                     제  3  경  ---  창옥병
                                     제  4  경  ---  낙귀정지
                                     제  5  경  ---  선유담
                                     제  6  경  ---  와룡암
                                     제  7  경  ---  백로주
                                     제  8  경  ---  청학동






1. 화적연(禾積淵)

영평 8경 중 제1경으로, 한탄강에 있는 큰 바위와 깊은 연못으로 이루어진 절경이다.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 경계에 있다.

수면 면적은 1,300여㎡이다. 마치 볏짚 단을 쌓아올린 것 같은 형상이어서 화적(禾積)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 형상에 대해 조선 후기의 문인 서계 박세당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암석이 극도로 기괴하여 윗부분은 마치 용머리처럼 앙연히 두 개의 뿔을 이고 있고 아랫부분은 거북 같다. 그 밑에 맑은 연못이 짙푸르게 고였다.

서쪽 벼랑은 모두 바위 봉우리인데, 삐죽삐죽 둘러선 것이 열두 봉은 됨 직하다.

 박태보(朴泰輔)가 ‘이 바위 이름이 너무 속되니 귀룡연(龜龍淵)이라 불러야 합니다.’라고 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한 늙은 농부가 3년 가뭄에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이 연못가에 앉아 한숨을 쉬며 “이 많은 물을 두고서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단 말이냐.

 하늘도 무심하거니와 용도 3년을 두고 낮잠만 자는가 보다.” 하고 탄식을 하고 있으려니 화적연 물이 왈칵 뒤집히면서 용의 머리가 쑥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가뭄이 들면 화적연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숙종실록』에도 이곳에 신하를 보내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西溪集)』에는 「화적연(禾積淵)」 칠언 절구가 전한다.



                                                           衣袖沾殘紫洞煙      (의수첨잔자동연)----자동 안개에 옷소매 젖어

                                       飄飄歸路入龍淵       (표표귀로입용연)----표표히 귀로에 귀룡연에 들어섰네

                                       更憐六六峯如畫       (경련륙륙봉여화)----더욱 어여뻐라 그림 같은 열두 봉우리가

                                              欲逼楓岑萬二千       (욕핍풍잠만이천)----풍악산 일만이천 봉에 방불한 것이








2. 금수정(金水亭)

영평 8경 중 제2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영평천 변에 있는 정자이다. 1989년 복원되어 포천시 향토 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 정자는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앞에 흐르는 맑은 물과 숲이 아름답게 어울리고 맑은 물에 낚시를 담그는 풍류가 서려 있는 곳이다.

 세종 때 김명리가 이곳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우두정(牛頭亭)이라 했는데,

소머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자를 에워싸고 흐르는 물도 두우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어떤 인연인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에게 이 정자를 주었는데, 양사언이 이 정자를 금수정이라 개칭하고

편액도 갈아 달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후 안동 김씨의 소유로 전해오면서 몇 차례 중수되었으며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89년 포천시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다.

 정자 현판은 양사언의 글씨이며 정자 옆에는 그의 시조 비인 “태산이 높다하되…”가 있다. 박순의 칠언 율시 「금수정」이 전하고,

서명응이 ‘금수정’과 ‘창옥병’에 대해 기록한 「동유산수기(東遊山水記)」가 『보만 재집(保晩齋集)』에 실려 전한다.







3. 창옥병(蒼玉屛)

영평 8경 중 제3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영평천 변에 있는 병풍바위이다.

 창옥병이란 이름처럼 기암괴석으로 된 푸른색의 병풍을 연상시킨다.

창옥병의 폭은 수백m나 되고 높이는 12~15m에서 수십m로 깎은 듯한 절벽인데, 절벽에는 고저(高低)·굴곡(屈曲)이 있고 암혈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 모양으로 돌출한 바위가 있다.

게다가 절벽에는 야생화가 피고 낙락장송도 있으며 작은 소나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등 오묘한 풍경은 가히 절경이다.

1931년에 암벽을 깎아서 터널을 뚫어 도로를 만들어 통행하였으나 최근에는 우회 도로가 생겨 현재는 일부 차량만 통행하고 있다.

 창옥병에는 암각문이 남아 있는데, 1588년(선조 21)에 박순이 절경 8곳의 이름을 붙였으며, 글씨는 조선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쓰고,

 신이(辛夷)라는 사람이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또 선조(宣祖)가 8자로 써서 박순에게 내린 글이 가로 및 세로 각각 60㎝ 크기로 새겨져 있으며,

박순이 지은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시를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 1700년경에 썼다는 글도 남아 있다.




                             題二養亭壁             (제이양정벽) -------- 이양정 벽에 쓰다

                             谷鳥時時聞一箇        (곡조시시문일개) ----- 골짜기의 새소리 이따금 들려오는데

                             匡床寂寂散群書        (광상적적산군서) ----- 책상은 쓸쓸하고 서책은 흩어져 있네

                             每憐白鶴臺前水        (매련백학대전수)------ 언제나 안타까운 건 백학대 앞의 시냇물

                             纔出山門便帶淤        (재출산문변대어) ----- 산 어귀를 나서자마자 곧 흙탕물이 될 텐데




선조의 윤음(綸音)은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으로 “소나무 대나무처럼 꿋꿋한 절조요,

물과 달처럼 맑은 정신”이란 뜻으로, 박순의 인품을 기린 글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산금대(散擒臺), 장란(障蘭), 수경대(水鏡臺)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김창협『농암집(農巖集)』에는 「창옥병」 2수가 실려 있고, 서명응의 『보만재집』 「동유산수기(東遊山水記)」에는 ‘금수정’과 함께 ‘창옥병’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성해응의 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는 백로주, 삼부연(三釜淵), 화적연, 금수정, 창옥병에 대해 쓴 「기동음산수(記洞陰山水)」가 실려 있다.

‘동음(洞陰)’은 영평의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까지의 이름이다.





4. 낙귀정지(樂歸亭址)

영평 8경 중 제4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에 있던 낙귀정이란 정자 터이다. 지금은 정자 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정자는 영의정으로 등용된 일이 있는 중신(重臣) 황 씨가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 집 근처에 정자 하나를 짓고 낙귀정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 뒤 황 씨는 나라를 배반한 신하로 혐의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황 씨는 자신의 무죄를 죽음으로 항변하였으나 살던 집과 부인, 자식까지 처벌하였다고 한다.

이 설화는 그 사연을 원통히 여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전하는 한시(漢詩) 작품으로 박순의 칠언 절구와 칠언 율시 각 1수씩 2수가 있으며,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1532~1607]의 칠언 절구 「제귀낙정(題樂歸亭)」 1수가 있다.





5. 선유담(仙游潭)

영평 8경 중 제5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백운동 계곡에 있는 연못이다. 이름 그대로 신선이 놀던 자리라고 할 정도로,

 백운산 기슭을 끼고 돌며 굽이치는 영평천 상류 계곡은 경치가 맑고 아름답다. 물에 잠긴 깎아지른 암벽 그림자도 좋거니와 암벽에 반사되는 물빛도 아름답다.

 암벽에 ‘선유담(仙游潭)’이라는 세 글자가 암각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양사언이 썼다고 전해오고 있다. 『농암집』에는 김창협이 지은 「선유담」이란 시가 실려 있다.




                          淸湍曲曲自回通     (청단곡곡자회통)-----맑은 여울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는 곳

                          側石幽花數瓣紅     (측석유화삭판홍)------물가 바위 숨은 꽃 두세 송이 발그레

                         不管招提路多少     (부관초제노다소)-----절간으로 가는 길 멀건 말건 나 몰라라

                         題詩且坐水聲中     (제시차좌수성중)-----물소리 속에 앉아 시나 한 수 써볼까







6. 와룡암(臥龍岩)

영평 8경 중 제6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수입리 산내지동에 있는 명승지로 영평천수입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약간 하류에 있다.

 와룡암은 바위의 기이함보다는 주위 풍경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예부터 철쭉이 피는 6월이면 활짝 핀 꽃이 그대로 수면에 비치어 절벽도 붉고 물도 홍류가 되어 수중의 사람과 물고기까지 붉게 보였다고 한다.

와룡암의 형태는 누워 있는 용처럼 생겼는데, 상체는 수면 위로 떠 있고 꼬리에 해당하는 바위는 길이가 50m가 되었다고 한다.

 이 기암의 이름은 고려 시대의 문헌에도 나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와룡이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 이전부터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홍수 예방 조치로 와룡암의 자취가 사라져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7. 백로주(白鷺洲)

영평 8경 중 제7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 한내천 하류에 있으며, 백로들의 쉼터라고 할 수 있다.

백로주는 바위라기보다는 조그마한 바위산이라 할 수 있는데,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져 마치 백로가 물속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는 형상을 연상시킨다.

백로암이라는 이름은 약 400년 전 문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전에 지어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최근 백로주 북쪽 하천 부지에 잔디와 나무를 심고 유원지를 조성해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바위에는 당나라 이백(李白)[701~762]의 유명한 시인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의 제5, 6구가 새겨져 있다.



                    三山半落靑川外   (삼산반락청천외)-------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떨어져 있고


                   二水中分白鷺洲    (이수중분백로주)-------두 강물은 백로주에서 중간이 나누어졌네




라는 이백의 시구를 새긴 인물은 경기 관찰사 동강(東岡)으로 전해져 온다.

동강이란 호를 쓰는 인물 중 경기 관찰사를 지낸 인물로는 조상우(趙相愚)[1640~1718]가 있는데, 확신할 수는 없다.






8. 청학동(靑鶴洞)

영평 8경 중 제8경으로,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에 위치하고 있다. 일동면으로부터 흘러내려온 물을 껴안은 듯한 암석 병풍과 같은 형태의 절벽이다.

창옥병처럼 장엄하지 않으며 유수량이 적기는 하나, 거암 단애의 절벽이 있고 그 밑에 맑고 푸른 물이 흘러 뛰어난 절경을 이룬다.

이 암벽 낭떠러지에는 ‘청학동(靑鶴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내려오는 전설로는, 어떤 가난한 효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이장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한 삽을 뜨는 순간

그 속에서 청학 한마리가 나와 슬프게 울며 창공에 원을 그리면서 날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효자는 그곳에 산소 쓰기를 단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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