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업힐 긴다운
계획
라이딩코스
운제?---2015 년 11 월 4 일 수요일 11 시 22분 출발 4 시 37 분 도착 5 시간 15 분
누구랑?---혼자서
전체길이---28 km 평균속도---5.34 km/h 최고속도---36 km/h 평균이동속도---7.4 km/h
주체할수없는 지랄병같은 개척라이딩의 유혹을 과감히 잠재우며 참다참다 잘 참아왓었는데
젠장 --- ------
아침밥 잘 무꼬 차분히 잘있다 10시쯤 몽유병 환자같이 주섬 주섬 챙겨서 휘리릭---
매번 거러듯 개척 라이딩은 고난의 연속이 대부분이라 아침 일찍 출발하여야 하는데 ...재수없으면 컴컴한 밤에 산속에서 지럴하는 불상사는,
우려-- 제발 아니길 바라며 요행를 바라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인간사가 아닌던가마는 속고 속으면서도 또 바란다.
황색선=== 차량이동으로 허난설묘지로 들어가서
적색선=== 찬차로 출발
청색선--- 원점회귀
출발===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29-5번지========== 비운의 여류천재 시인 허난설헌 묘
주차장에 차를세우자 말자 잔차를 부리며 서둘러 출발한다.. 무갑리로~무갑리 계곡으로~ 무갑산으로~~
무갑산아 게 얌전히 있거라 내가 간다 거부 하지 말고 앙탈부리지말고 다소곳히 반기거라
무갑리 계곡은 여름을 보내고 휴식중
상쾌하다. 나중에야 우찌되던 엉클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이 느낌은 ? 무갑리 계곡이야-- 세상이야-- 삶이야--
계곡은 울긋 불긋 아름답다. 나무 마다 풀마다 각기 저마다 가을색을 띄우곤 앞다투어 뽐낸다 . 저 도도한 자태 들을 바라.
한 패달을 굴릴때마다 마다 그 경쟁의 대열에 가까이 간다 구경꾼의 입장으로
1--우측으로 ( 사유지 랍니다 )
나무 이파리 하고
풀 이파리 하고
초록에서 노랑 빨강으로 가는중에...
아니문,
어느새 갔는지도 모리는 날에,
잔차타고 무갑리 계곡으로 들어선다.
하늘은 안푸르고 더럽다.
하지만 ,
공기는 시원하다.
언넘의 시끼가 빨고난 후
풍겨대는 니코틴 냄새도 엄고,
고운 얼굴에 덕지덕지 쳐발른
페인트냄새도 엄고,
천지를 진동하며뿜어대는
그 머시라 - 향수란것도 엄다.
합해서 말하자면,
억지스런 냄새가 엄다는것이다.
무엇이 더 필요하겟냐.
이 공기 하나만으로도
대 만족 시럽운걸.
사방댐이 있는 여기까지가 임도이며 지금부터는 싱글길
길 양옆으론 멧돼지 먹이찾음 길이 갈구리로 죽죽 거은듯 흉물 서럽게 파헤쳐져 있지만 상판대기는 안보임
바나나 두개로 허기진 배를 미리 채우고.
멧돼지 흔적
2---막혔다-- 아래서 부터 트랙을 비켜온 때문인지 잔차는 더이상 진행 불가한 덤풀길이다
되돌아 갈수는 없고 좌로 비틀어 능선으로 잔차를 메고 한손으로 나무 가지를 지탱하면서 올라가보는데
3 발자욱 전진에 1 발자욱 미끄름을 탄다
최악이다 경사가 홀몸으로 가기도 어려운 길이다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끊일지 않고 후회막급이라...
전생에 내가 무신 죄를 졌다고 이고생이람 ....
천신만고 끝에 겨우 능선에 올라붙자말자 첫마디 "사라따" 온몸은 소금에 절인 시금치마냥 헐헐러러~~
무갑산 정상 가는길
무갑산=
'무갑산' 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항복을 거부 한 무인들이 은둔했다는 설 도 있고 산의 형태가 갑옷을 두른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숲이 울창하며 골짜기의 개울이 아름답고 물이 맑으며 시원한 산, 볕이 내리쬐는암릉과 기암괴봉보다 숲속 그늘의 흙길이 편안하고 가끔 알맞게 가파른 산이다. 관산과 사이에 검은골 등 아름답고 깊은 골짜기에 맑은 물이 시원하다.
3---우선 먹고보자 점심이라고 갔고온건 샌드위치빵3조각 요구르트 한명 배를 채운다
요기를 하고 자--- 지금부텀 신나는 다운이다하고 들이대니 요딴길이 나온다
잔차는 어께메고 두손은 로프를잡고.................................도데체 멀하는건지
4--- 웃고개 무갑리 마을회관에서 좌측 여기로 올라와야하는데..
난 곤지암읍 으로 향한다
5---뒷골산 여기가 최종 꼭대기 지금부텀 곤지암으로 오르락 내리락 다운으로
곤지암 읍까지 4 km 란다 업 다운
앵자봉아래 이스트밸리 cc
이능선 아래는 그 무시무시한 전설를 갓고있는 곤지암 정신병원 이 있는곳일것이다
쭈--삣
임도를 만나다 지도에도 안나오는 임도이다
시원하게 내리손다 10 년만에 돌려받는 내돈 원금에 이자까지 더하여 돌려받듯
6---탈출구 1 차 임도 날머리 아직 마을까지는 더가야 하지만
황색선으로 갈려고 들이밀다 허거덕 껄떡 업힐이 눈앞을 가로막아 되돌아 왔다 중간 탈출
곤지암천 잔차길
허난설헌 묘역 도착
오늘 무갑산 길을 선택한것도 어쩌면 여기를 둘러보기위함인지도 모른다 허난설헌
천재여류시인 지구상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위인임에도 생각보담 묘지는 ...
이름한자가 어렵더라 누고 이게..? 박두진 ?
곡자 시비
뒷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 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도 잘 그렸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류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생애 초반
가계 배경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은 첫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난설헌어머니는 두번째 부인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유년기와 수학
일찍부터 그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아버지 허엽이 일찍 여러문인들과 교류하며 신학문을 접한덕에 당시 아들딸 분별이 심한때였으나
허엽은 딸차별없이 난설헌을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같이 글를 가르쳤다.
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훗날 난설헌이 조선에서 태여난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는바 손곡 이달이 서자자식이라 뛰여난 재주임에도
벼슬길에 지장을받고 있는 그 서러움을 직접보고 배운영향이 컸다는것으로 추측한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불행한 결혼 생활
결혼 생활 초반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를 한 구절 써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
” |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을 조롱했던 것이다.
시집살이와 갈등
고려말 또는 조선전기에는 남여가 결혼하면 남자가 장가간다하여 남귀여가(男歸女家) 즉 남자가 여자집으로가 처가살이하는게
풍습이다가 중기로 넘어오면서 여자가 시집살이로 바뀌였는데 난설헌이 시집을 갈때 이때부터가 시집살이가 시작이였던것이다
만약에 조금만 늦게 그풍습이 이여져 난설헌이 친가에서 살면서 편히 그 재능을 펼쳤더라면 어찌 됬을까..
하는 아쉬움이 하늘를 보고 탄식하게 만든다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허난설헌, 「곡자(哭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두 무덤이 서로 마주 보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蕭蕭白楊風 (소소백양풍)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鬼火明松楸 (귀화명송추)
지전을 날리며 너희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지전초여혼)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玄酒存汝丘 (현주존여구)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應知第兄魂 (응지제형혼)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夜夜相追遊 (야야상추유)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縱有服中孩 (종유복중해)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安可糞長成 (안가분장성)
황대 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浪吟黃坮詞 (낭음황대사)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도다.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
곡자( 哭子 ) -- 곡 -소리내어 울 곡 자-아들자 자식을 잃고 눈이 멀 만큼 운다는 뜻이나
공자의 제자 자하 ( 子夏 ) 가 아들을 잃고 너무나 슬피 울어 눈이 멀었다는대서 유래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고 말았다.
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
생애 후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 |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
” |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 |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
” |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89 년 (선조 22년) 3 월 19 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 |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
” |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후일 그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추증 예겸에 따라 증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시문집 간행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의 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알려지면서 격찬을 받았다.
한편 1711년에는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그의 시를 간행, 한때 애송되기도 하였다.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영조 , 정조 이후 중인과 평민 등도 문학과 시조 작시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성과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후
그 뒤 임진왜란과 허균이 광해군 말년 옥사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그녀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9월에는 그의 시작품 168편을 모아 청 만력 40년 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새롭게 발굴됐다.
≪취사원창≫은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출신 문인인 반지항(潘之恒, 1556~1622)의 문집 『긍사』(亘史)에 1책으로 수록되어 들어있었다.
이 시집에는 허난설헌의 산문 글 1편도 들어있었는데,
당시 중국 난징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생인 김영숙이 처음 발견했고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교수 박현규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이던 이 소장품을 정밀분석해 한국 학계에 소개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취사원창은 중국 학계에서도 호문해(胡文楷)가 1957년 간행한 『역대부녀저작고(歷代婦女著作考』라는 책에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실전된 상태였다.≪취사원창≫에 나타난 난설헌 시는 오언고시 14편, 칠언고시 11편, 오언율시 6편, 칠언율시 14편, 오언절구 20편, 칠언절구 103편이며 산문 1편은 그가 8세 때 지었다는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다.
처음 세운 비석은 실전되었으나 조선 멸망 이후 다시 세워졌다. 새 비석은 이숭녕(李崇寧) 등에 의해 오석으로 세웠으며,
전면에는 이숭녕이 지은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현재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언덕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었다
그녀는 세 가지의 恨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친필과 앙간비금도
고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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