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648-----수원-------------융건릉,태봉산,서봉산,황구지천38

단석 2016. 4. 8. 22:53





수원-융건릉,태봉,서봉,황구지천38.gpx



융건릉 주차장----태봉산----지내산----상방산----서봉산----황구지천----주차장


2016년 4 월 8일  10 시 출발 ---  5 시 15 분 도착


평균속도==5.26 km/h                최고속도==45.18 km/h       평균이동속도===7.83 km/h          이동시간===4 시간  48분


상승시간===3 시간 37분            하강시간=== 2 시간 48 분


겨울 번개를 너무 멀리한관계로  뱃가죽만 늘어져   이러다간  올챙이 되것다 싶어   내일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탈출한다고 ---자면서다짐

탈출---예상한대로  계획한 코스도 다못돌고 몇번이나 잔차허리붙잡고 혀바닥 바깥공기 쉬었다.

코스는 전반적으로   이곳 수원 쪽 라이더들의 명성과는 좀 다르게 밋밋한 길이였다   남한산성 싱글이 몸에 익어서 거런가

그러나 한겨울 살찌운 뒷뚱한 몸으로 전초적인  라이딩으로 최적인것 같다    태봉산. 서봉산 다운은 진짜 일품이였다 -- 슁~~~



"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





1--우로


출발 합니다   매번 거러하듯  혼자  간다는게 유쾌한건 아니지요..   시무룩~~


융건릉 주차장 도착  잔차를 부리고  출발합니다    융건릉을 먼져 보고 가는냐 와서보는냐를 갈림하다가

라이딩하고 와서  둘러 보기로 하고  산으로--


주차장 길건너로 시작 합니다


2--들머리



3--임도



3-4  사이



4--싱글 진입  업힐





원빵에 올라가기--


5--



6--

7--봉담가든 식당 뒤로 진입




고향에 온것 같다


송진 향기에


솔 바람과


그리고-


솔잎 삭는 향기가


등뼈를 타고


오르고 올라


내 육신을 감싼다~







8-- 


태봉산 정상




9--

10--고개넘기전  좌측길로 --  고속철도 굴로 지나서 바로 우  등산길로



11---서봉산 가는 업힐


서봉산 업힐로  오기로 올라갈려다   ---  내몸은 생각도 않고  욕심만 앞서  잔차는 내 팽겨치고

무릅꾾고 앉아 헥 헥 거리고 있음다


서봉산 정상


정상에서 서쪽   화성시 봉담읍 덕우저수지








12--서봉산 날머리


황구지천 뚝방길


황구지천=황구지천의 이름이 평택시 황구지리에서 유래한 듯하다. 황구지천의 하구가 황구지리기 때문이다. 다른 설에 의하면 누런 곶이라는 말이 변하면서 황구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천(大川)'으로 소개된다.






황구지천에  서식하는 동물


작은산 하나까지 포기하고  융건릉을 볼려고  허벌나게 달려왔으나  ---- 입장이 끝났다

아침에 먼져 둘러보고 라이딩을 했어야  했는데 --   착오다....   젠장---




융릉

능의 구성

융릉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태이다.

 융릉은 1789년(정조 13)에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형태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능의 역사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이야기

장조의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 ~ 1762년 음력 윤5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되었다.

특히 1762년(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두었다.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왕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정성왕후의 혼전)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왕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왕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왕세자의 자결을 재촉하니, 왕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 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왕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왕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왕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왕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1899년(광무 3)에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이라 하였다가 곧 바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의황제라 하였다..

 


건릉

 

건릉은 제22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 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다.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 군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지만 정조는 초창기 불안했던 입지가 강화되어 영조의 후사가 되는 것은 문제없었다.

그러나 영조 51년(1775) 노병이 깊어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방해해 조정이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

.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정조에 힘을 모아줄 수 있는 위치였으나,

 세손인 정조가 그를 탐포하고 무지하다고 멀리하자 원한을 품고 세손의 적당이 된 것이다.

 

1776년 영조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바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장묘를 영릉으로 격을 높이고 생부의 존호는 장헌세자로,

묘소는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했다. 왕통에 관한 정리를 마친 뒤에는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70여 명을 처벌해 분란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했다.

  

정조의 한은 아버지가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사망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정조는 당쟁에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했다.

 

 그럼에도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정조의 사망에 대해서는 독살되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룬다.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정조의 독살 의혹을 제시했다. 물론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독살의 개연성과 심증이 있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사인은 '등창'이다. 이는 등에 난 종기를 말하며 치료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등창의 고름 환부를 직접 짜기만 해도 되는데 굳이 수은 중독의 위험이 있는 연훈방을 처방했다는 점이다.

 특히 붕어 순간에 사관과 승지가 배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조는 대비 정순왕후가 신하들을 물리고 혼자 약제를 들고 들어간 뒤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정순왕후는 당시 정조의 죽음을 예견한 듯 군대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했고 약방제조를 물린 뒤 직접 약제를 들고 왕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곡소리가 들렸고, 왕의 사망이 선포되었으며 왕세자(순조)에게 대보가 넘겨졌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는 11세의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친정 식구인 안동 김씨를 조정에 끌어들여 순조, 헌종, 철종의 60여 년에 걸친 세도 정치의 주역이 된다.

 

정조의 무덤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자주 찾았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릉원(융릉) 근처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무덤의 동쪽에 모셔졌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여론 때문에 효의왕후가 죽은 후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

 원래 정조의 묘호는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높이고 정종 역시 정조라 고쳐 왕실의 묘호를 격상했다.

 


건릉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아버지의 융릉처럼 장대한 모습은 아니다.

융릉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반면 정조의 능은 그의 사후 유신들이 융릉처럼 만드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릉으로서의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다. 능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넓은 잔디 묘역 중간 왼쪽으로 재실이 있다.


 능은 재실 위 높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능에는 석상과 망주석, 문·무인석이 있다.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고 난간석이 없지만,

 건릉에는 난간석이 있고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장명등에 새겨진 무늬가 융릉의 것과 같음을 볼 때 한 장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융릉과 건릉 정자각 앞 제향 공간에는 다른 능과 달리 신로와 어로 사이에 판석이 넓게 포장되어 있다.

 이는 두 왕이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제가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융건릉은 정조의 효행이 깃든 전통적 효 문화 유적으로

, 현재 융건릉과 용주사, 만년제(지방 문화재 제161호)를 연계하는 효테마공원이 계획되고 있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1762년 이른 봄. 세자로 책봉된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힌다.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한 영조의 뜻을 거역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둔 것이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구중궁궐의 암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 단 하나뿐이었던 아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이었다. 하지만 세자의 대리청정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 순탄할 리 없었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괴이한 행동을 부렸던 사도세자는 끝내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게 되었다.
그 후 아들을 죽인 비정한 군주 영조는 이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그의 손자인 정조를 세자로 책봉하게 되었고, 영조가 죽고 나서 정조는 조선의 제 2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고 가장 먼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증하고 화성시 안녕동으로 융릉을 모시고, 농을 모시기 위해 원찰인 용주사를 곁에 건립하여 해마다 이곳으로 행차하여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 곁에 있기를 바랐던 효성 지극한 정조는 융릉 곁에 묻혔는데, 이를 건릉이라고 한다.





융,건릉을 지키는 소나무들입니다 화장실좀 씁시다 하고선 들어가서  이소나무 몇거루만 보고 나옵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 났엇지요


 양주 베봉산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보곤 항상  가슴적시듯 죄스러움을 간직하다  여기 화성으로  크게 옮김니다

아버지 묘주변으로 45 만 거루나 되는 소나무를 심고  한양에서 화성 여기로 오는길목에도 500 그루를 심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조는 소나무를 끔직히 아끼고 좋아했습니다


여기 융릉 의 소나무를 아끼고 가꾸는중  어느날 한양에서 아버지를 뵈러 융릉에온 정조는 감짝 놀란다  소나무들이 말라죽고 있었던 것이다

신하보고 왜 이런냐고 묻자  송충이가 갉가 먹었서 거렇다고 아뢰니  정조는 노발대발 하면서 당장 그 송충이를 잡아오라--

하구선   송충이를 들고  "  니 어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식으로써 소나무를 아껴는심정인데 니가 죽게 만드는냐  차라이 내 오장육부를 먹어라"

면서 그송충이를 삼켜버립니다   그일이있은후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가 수십마리 날라와서는 능주변 소나무 송충이를 전부 잡아먹어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정조의 효심을 대변하는 이야기겠지요





판단 미스로  능침  은 보도못하고     주변 만 둘러보다  갑니다

다음에 다시한번 와야  겟지요...


장조여 -


슬퍼 하노라.


거넘에 권력이 먼지


애비가


자식의 숨통을 끊나니.



홀연히


 왔다가


미처


펴보지도 못하고


바람 처럼 갔구나


편히 잠드소서


그대 보러 온


 난


멍청한 판단으로


 구냥 가게 됨다...


사도여


편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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