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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단석 2009. 6. 8. 11:03

 

 

우리 땅의 숨겨진 비경, 오지(奧地) 마을 23 곳

 

  1 영월 와석리 '어둔마을'     2 정선군 " 안도전 마을"       3 내린천변의 '개인동'과 '삶둔'

 4 정선 발구덕                      5 명주 한터 마을                 6 삼척군 하장면 "한소리"

 7 영월 문산리                      8 연곡 가마소                     9 삼척 " 덕풍마을 "

10 정선 단임마을                11 의성 금봉리                    12 봉화 홍점 마을

13 울진 '왕피리'                 14 정선 "연포, 소사마을"      15 봉화 두음리 '듬골'

16 인제 '설피밭'                 17 하동 "논골마을"               18 경남 산청 "오봉마을"

19 단양 "빗재 마을"             20 장수 "신기 마을"              21 청송 "내원동"

22 청송 "계당리"                 23 홍천 명개리 "아침가리"


 

 

1.영월 와석리 어둔마을

김삿갓의 방랑벽을 잠재운 곳으로 그의 거처와 무덤이 있다.

와석리는 어래산과 마대산 사이를 흐르는 남대천의 중,하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이 발전을 하지 못하고 오지로 남겨져 있는 것은 행정의 사각지대이기 때문 , 찻길에서 20리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열악한 교통사정이 겹쳐 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이곳의 특색은 한마디로 절경이라는 점. 산과 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바위 병풍과 반석으로 이어지는 계류는 그야말로 별천지여서 "무릉계"라는 찬사를 떠올리게 한다.

무릉계 라고 극찬한 이는 김삿갓.
희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영월의 산수미에 반해 동강의 삼옥리와 영월의 와석리의 안쪽 골짜기인 어둔리에서 수 년간 정착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둔리 일대에는 일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오지로 버려졌었는데 그 절경이 최근에 알려지면서 외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오지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곳은 들목인 들모랑이에서 골 어귀를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최근에 영월군에서 김삿갓 유적지를 정비한다고 진입로를 포장해놨다. 골짜기가 넓어지면서 민가가 나온다. 이곳의 이름은 싸리골, 이런 산골에서 논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 마을에는 논이 있다.

이 마을에서 반듯이 먹어봐야 하는 것이 있다. 물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싸리골에서 좀더 계곡으로 들어가면 곡골, 싸리골에서 곡골 일대와 노루목에 이르는 10리 구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김삿갓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까지는 들목 인 들모랑이 부터 20리 거리인 8km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살던 집터는 집터가 있는 어둔리는 노루목에서 5리 정도를 마대산 동쪽 골짜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한다. 노루목에는 "김병연지묘"라는 작은 묘가 있다.

노루목에서 김삿갓이 살던 어둔리의 집터로 가다보면 성황당이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길로 접어들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로 가는 길인데 초여름에 찾아가면 온갖 야생화가 버려진 묵밭에 피어있다.

▶ 찾아 가는길

어둔 마을은 영월읍에서 30km 떨어진 곳이지만 들모랑이 까지 관내버스가 다니므로 들모랑이 까지는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다.

옥동 초등학교 주석분교 옆에 노루목상회를 기점으로 남대천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데 입구에 김삿갓 조형물을 세워놓아 길손을 이정표 구실을 한다. 들목에서 와석리 노루목까지는 20리를 걸어야 하고 노루목에서 어둔 마을까지 2km를 더 걸어가야 한다.

최근에 영월군청에서 관광지로 개발을 해 진입로가 모두 포장이 되었고 노루목에서부터 김삿갓이 살던 집터까지는 옛길 그대로다.

 

 

 

2. 정선군 " 안도전 마을"

돌담과 양철 지붕을 얹은 키 낮은 집들이 있다.

안도전 마을은 골골이 쏟아진 물이 어우러지고 골지천과 임계천이 만나 정선의 조양강으로 흘러 남한강의 물 허리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다. 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안도전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안도전 마을로 가는 길은 청옥산 자락이 깊고 푸르게 드리워져 있어 풍광을 감상하기엔 더 없이 좋다. 흙먼지 풀풀대는 황토길의 끝, 고적대 아래 마을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고적대와 중봉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쳐 올라 모롱이를 휘돌 때마다 냇가 양편으로 돌담을 두르고 양철지붕을 얹은 키 낮은 집들이 드문드문 햇빛을 이고 있는 마을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이곳에서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은 탁왈수 씨를 비롯하여 몇 집 되지 않는다. 구부렁 골로 몇 걸음 떼면 오래전에 문을 닫은 도전 초등학교 내도전 분실이 보인다.

교실 한칸이 전부인 이곳은 화전민들의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이다. 지금은 내 도전의 농기구 창고로 쓰이고 있지만 산골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던 곳이었으리라. 학교는 아이들의 웃음이 왁자하게 터졌을 당시를

기억이라도 해내려는 듯이 당시의 물건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덩그러니 빈 공간을 지켜내고 있다. 아름들이 황철나무가 운동장 곳곳에 우뚝 솟아 지나는 길손에게 쉴 공간을 만들어 준다.

버드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가마소와 구유소를 지나면 버드내를 적시고 온 물과 고적대에서 장아리를 지난 물길이 만나 작은 아우라지를 또 하나 만든다. 해 질녘 아우라지에서 발을 적시고 노을을 바라보는 기분은 오지에 온 여행자의 심연에 젖게 한다.

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찾아가는 길

정선에서 동해로 이어지는 42번 국도를 따라가면 임계를 지나 7km를 가면 내도전 가는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식당) 간판이 이정표 구실을 한다. 내도전에는 차가 들어가지 않는다. 큰길에서 10리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오염이 안된 내를 따라 들어가면 맨 끝에 내도전 마을이 자리잡고있다. 

 

 3. 내린천 변의 "개인동"

밭떼기를 일구는 몇몇 농군들이 오지의 삶을 지키고 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 산골의 마을들이다. 도로가 뚫리고 개량한 집들이 들어서면서 산촌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개인동이 바로 그런 곳이다. 주변 경치가 절경이다 보니 도로가 포장이 되고 별장 같은 집들이 하나둘씩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이제는 오지마을의 면모를 많이 잃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 곳을 가려면 하루를 꼬박 잡아야 한다.

강원 지방은 인제, 홍천에 삼재 불입처로서 "삼둔 5가리"가 있다는 내용의 정감록이 널리 유포되었다. 삶둔, 월둔, 달둔의 3둔과 명지가리(명지거리), 젖가리, 아침가리(조경동), 영가리, 명가리(명개리)의 5가리가 그곳이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깔고 있는 이곳은 오지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개인 약수터와 대개인동을 가는 길목은 무인지경의 심산유곡이다. 파리목으로 불리우는 고갯마루를 넘으면 대개인동이 보인다.

계곡을 거슬러 1시간 가량 오르면 개인약수터가 있다. 삼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곳에 탄산수 주성분의 개인약수가 솟아나며 개울의 바닥 돌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솟아나는 약수 만큼이나 정갈하고 정성스런 수십 개의 돌무더기가 서있는 약수터의 풍경은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 산신령에게 약수의 효험을 비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대개인동을 떠나 소개인동으로 가려면 내린천을 앞두고 산등성이를 올라야 한다. 몹시 가파르고 험한 산허리의 오솔길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다. 이렇게 두메 산골에 정말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 때 즈음 산 속에 완전히 갇혀있는 소개인동에 이르게 된다.

소개인동은 "속에 있는 동네" 의미의 이름처럼 산간 분지의 숨은 마을이다. 이곳은 안식교도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미산리 빈지동 안식교의 독실한 교인들로 토요일을 지키며 금욕생활을 해오고 있다. 옥수수와 감자를 주로 가꾸는데 농경지의 넓이는 약3만평, 토종벌을 쳐서 생계유지에 보탠다.

▶ 찾아 가는길

내린천은 인제군 상남쪽에서 거슬러 올라도 좋고 원당리로 들어가서 냇물을 따라 내려가도 좋다. 상남으로 들어가는 경우 미산리 까지는 하루 한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길 찾기가 어려운 점은 없다. 대개 계곡이나 내린천 변을 따라 가면 마을을 만나게 된다.


 

 

 

 

4. 정선 발구덕

동네 곳곳에 구멍이 자꾸 생겨나 한국의 이색지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증산역에서 1km 정도 걸어 올라가면 민둥산에 다다르게 된다. 이 마을이 오지로 남아 있는 것은 동네 곳곳에 구멍이 생겨 동네가 가라앉을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이곳을 뜨게되어 폐허로 버려지는 집이 생기면서 개발이 전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곳을 여행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을에 커다란 구멍?여덟개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윗발구덕 마을이 자리잡은 "윗 구뎅이" 남동쪽 아래의 아래 발구덕 마을이 자리한 "아랫 구덩이" 동쪽
옆의 "큰 솔밭 구덩이"와 "능정 구덩이" 민둥산 남쪽 시루봉 근처의 "글등구뎅이" 그리고 민둥산 주변의 3개까지 합쳐 구덩이가 모두 여덟 개다. 그밖에도 자잘한 구덩이는 수없이 많다. 또한 없던 구덩이가 생기기도 한다.

때문에 밭을 갈던 소가 툭하면 발이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25년 전 일본학자와 공동으로 이 발구덕 마을 주변지형과 동굴을 조사한 바 있다. 조사자에 따르면 이 구덩이들은 돌리네(Doline)에 해당되며 발구덕마을은 이들 돌리네가 밀집한 카르스트 지형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돌리네란 석회암 토지의 표면에 볼 수 있는 사발 모양의 움푹 패인 땅이다.

이런 돌리네가 많아 이 마을이 점차 밑으로 꺼지게 되는 것이다. 아래가 커다란 동굴로서 지표면과 통한 굴을 통해 흙이 자꾸 빠져나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은 마을 사람들의 경험으로 뒷받침 되고 있다.

쇠구뎅이는 윗 발구덕 마을의 것보다 한결 커다란 마치 포크레인으로 파낸 듯한 깊이 5m, 길이 30m의 함몰지다. 이 구덩이는 매년 장마 때마다 물이 가득 차는데 어느 순간 한 가운데에 공기가 5~6m 수면위로 치솟은 다음 순식간에 빠진다. 이 물은 초등학교 뒤 동굴로 흙탕물이 되어 흘러나온다.

민둥산 주변에는 동굴이 여러개 있다. 민둥산 정상부에 깊이 71m의 삿갓굴 과 깊이 18m의 수직굴 이 있는 것을 비롯 민둥산 북쪽 지억산 의 남쪽 골짜기에는 기차도 드나들 수 있을 많큼 크다고 해서 주민들이 이름을 붙여놓은 기차굴 , 물이 많이 나온다는 뜻의 물나는굴, 증산국교 뒤 시루봉의 굴동굴 등 일일이 셀 수 없는 굴들이 많다. 동굴탐험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에 따르면 이 곳은 이 굴들이 모두 하나로 통해 동양 최대의 석회동굴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발구덕 마을 아래 땅속에 미로처럼 얽혀 있을 동굴은 아직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종유석이며 석순 등 동굴의 풍치가 일급인 것으로 밟혀졌다.

▶ 교통

청량리역에서 태백선 열차를 타고 증산역에 하차. 증산역에서 도보로 1km를 가면 민둥산이 나온다.


 


5. 명주 한터 마을

오대산 송천 변에 위치한 수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곳.

이 땅에 백두대간 만한 골격을 지닌 산맥이 없는 만큼 그 등허리를 파고 오른 송천이라 그 깊이를 따를 강이 없다. 이 송천가 변에 위치한 마을들은 오지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동초밭, 가락동, 소란, 한터, 자오동, 석동거리, 사이수터, 재도리, 다리새, 새터, 배나드리, 등이 송천 변의 오지인데 그중 한터 마을은 송천 의 중류에 있다. 서울에서 당일로 한터에 가려면 밤길을 걸어야 한다. 증산까지는 급행열차를 이용했지만 증산에서는 완행열차로 갈아타야 구절리에 닿게된다.

구절리는 기차가 들어가는 최고의 산간 오지로 알려져 있다. 종량동을 지나면 대기리에 도착한다. 대기리는 행정구역상 명주군 왕산면에 속하는데 한터를 한자로 표시한 이름이다. 한터에는 대기초등학교 한터 분교가 있다. 이 학교 아래쪽에는 10가구 미만의 가구가 있다.

이 마을에 사람이 둥지를 튼 것은 줄잡아 400년은 된다. 병자호란을 피해 이곳에 들어와 지금껏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감록에 의하면 오덕지기라는 말이 나온다. 황정덕이, 황철덕이, 장두덕이, 구비덕이, 안반덕이, 등인데 이것은 발왕산과 조고봉, 그리고 구절리의 고비덕봉이 감싸고 있는 골짜기들의 지명이다. 그 오덕지기의 중심이 한터다.

동네에는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듯이 수 백년 묵은 성황당이 있다. 서낭당에는 요즘도 음력 9월9일에 제사를 치르는데 전 주민이 정성스레 참여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은 빈집이 늘어갔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송천을 떠나 도회지로 간 것이다.

한터에서 배나드리까지 30리 구간에는 사이수터, 재도리, 다리재 등의 서너 마을에 한두 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배나드리라는 지명은 그곳서 출발하는 뗏목에서 유래된다. 일재때 뗏목으로 송천의 소나무를 뗏목에 실어 나르던 시절에 붙여진 것이다.

송천변의 수달래는 이곳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 마을을 떠나고 싶어도 수달래를 볼 생각에 떠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수달래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수달래가 만개하면 송천은 그 꽃이 물에 비쳐 빨갛게 타오른다. 굽이굽이 피어난 수달래를 보면 오지의 서러움과 한이 절로 풀린다고 현지인 들은 말한다.

수달래가 피는 시기는 5월 초순경, 이 장관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이 시기에 이곳을 방문하면 좋을 듯하다.

▶ 찾아가는 길

하류인 구절리에서 상류의 수하리까는 외딴집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100리 계곡이 계속 이어진다. 구절리 에서 돌거리 까지는 한터 주민들이 10년 간 땀흘려 만든 도로가 있어 차량을 그곳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 걸어서 갈 경우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는 길이어서 걷기에는 무척 편하다.

 


 

6. 삼척군 하장면 "한소리"

곡식도 찧고 고추도 빻는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

정선에서 백전리행 버스를 타고 백전리에 내려 도보로 5km정도 걸어가면 만나게 되는 한소리 마을은 마을 초입에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태백산의 정기를 가득 담은 물이 용솟음쳐 솟아나는 곳에 물레방아가 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그곳을 용소 라고 하는데 용이 솟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직경 30cm의 소에서 검푸른 물이 시간당 10톤씩 솟아난다. 그 위에는 물이 전혀 없어 말라붙은 계곡이 있을 뿐, 이 물은 태백의 청정수로 물의 힘이 저절로 물레방아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물레방아를 이용해 곡식을 찧어오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면 전형적인 산촌의 풍경을 대하게 된다. 지붕은 함석지붕으로 고쳤지만 집 몸체는 그곳 지방에서 많이 나는 나무를 이용해서 지은 너와집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준다.

산자락에 낮게 드리운 집들과 고랭지 채소가 자라고 있는 밭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해발 800m의 고지의 경사면에 넓게 밭이 있다. 마을의 동쪽에는 해발 1,307m의 대덕산이 솟아있다.

대덕산 넘어 창죽동에는 한강의발원지인 검용소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굴과 구멍이 많은 동네이다. 물 나오는 굴도 5~6개나 된다. 소의 콧구녕처럼 생겼다는 쇠콧구녕굴, 장수가 나왔다는 장수굴, 굴골이라는 석회동굴등 동네가 구멍과 굴 투성이다. 용소 아래쪽에 세 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숫용소라는 석회동굴에서 는 장마때만 물이 나오고 암용소 는 장마때 물이 넘친다.

▶ 찾아가는 길

정선에서 동면을 가는 버스를 타고 백전리에서 하차한다. 백전초등학교가 있는 곳에서부터 버스가 들어가지 않아 걸어 들어가야 한다. 한소리 쪽으로 길을 잡아들면 외길을 따라 5km 걸어들어 가면 한소리에 닿게 된다.


 



7. 영월 문산리

동강 변의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 있는 오지마을

동강은 풍부한 유량과 넓은 강폭을 이루고 있지만 주변의 산세나 지형으로 따지면 강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다. 극심한 양안이 검은 절벽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면 그 절벽 아래는 흐름이 멈춰진 듯 소 깊은 웅덩이가 버티고 있다. 절벽에서 보면 동강은 어느덧 없어지고 첩첩한 산줄기만 시야에 가득 잡힌다.

이 강변에 자리잡은 마을이나 이 지류를 거슬러 올라 주변 산 속 계곡으로 파고든 마을들이 여지껏 오지로 남아있는 것은 이렇듯 험한 주변의 산세 탓이다. 한적한 풍경의 동강변에 위치한 섭새 마을을 지나 동강을 건너 거운리를 들어서게 된다.

거운리 에서부터 동강을 버리고 서쪽 산록의 절운재를 넘어 문산 나루터로 내려서게 된다. 버스의 종점 문애리. 이곳에서 문산리로 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타야한다. 동강 건너편에 있는 문산리 본동 나루터 쪽으로 소리를 질러 배를 보내달라고 외치면 배가 건너온다. 마을 사람들이 월급을 주고 월급을 주고 사공을 고용한 배라 마을 사람들에게는 배 삯을 받지 않지만 외부인에게는 약간의 배 삯을 받는다.

배를 건너 도착한 문산리. 오지마을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을 앞을 길게 흐르는 동강, 그 뒤를 굽어보듯 치솟은 검은 절벽, 자갈밭과 하얀 모래톱 위로 넓게 펼쳐진 옥수수 밭과 고추밭, 그리고 마을마다 무슨 성루처럼 세운 황토빛의 건조막 등이 한데 어우러져 보기 좋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이 마을은 70년대 들어와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회지로 나가는 사람이 줄을 이어 20여 가구만 살고 있다. 절운재를 넘는 버스가 10년 전에 생겨 통행의 불편함을 해소하였고 그 길을 따라 전기도 들어와 전파매체도 보급되어 오지물을 어느 정도 벗었지만 비가 조금만 뿌리거나 눈이 오면 10리 밖 절운재 남쪽 장화동 까지만 버스가 다녀 문산리 주민들은 아직 오지 삶을 감내해야 한다.

절운재가 막히면 진탄 나루터나 달운으로 넘어가는 15리 산길을 걸어가야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로 들어오는 버스편으로 타지방 나들이를 할 수 있다. 교통의 불편으로 인해 오지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10년 전만 해도 주 농사가 담배였는데 고추농사로 작물을 바꿔 마을은 온통 고추밭이다.
동강 변의 경치를 보고 싶다면 강변을 따라 문희동까지 걸어 갈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영월 버스터미널에서 문애리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 길이 끝나고 나루터가 이어지는데 문애리에서 강 건너편에 있는 배를 보내달라고 하면 배가 오는데 항상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리 연락을 해야한다.

 


8. 연곡 가마소

마을 복숭아 꽃, 살구꽃이 흐트러지게 피는 고향의 봄과 같은 마을

강릉에서 동해바다를 끼고 주문진 쪽으로 30리를 가면 바다로 흘러 들어오면 큰 개울이 나온다. 오대산 노인봉 일대에서 동쪽으로 흘러들어 오는 연곡천 이다. 이 연곡천변에 위치한 이 마을을 가려면 어성전을 통해 가야 한다.

어성전 사거리에서 가마소 마을로 가는 푯말을 보고 외길을 따라 줄곧 가면 마을을 만나게 된다. 마을 가는 길목에는 우말과 가진동이 있고 머구재를 넘으면 가마소 마을이 오대산에 푹 싸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개 마루에서 내리막길을 휘돌아 가다보면 가마소 윗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 뒤에 솟은 두루봉. 그 기슭에서 발원하는 남대천은 길쭉한 가마소 마을을 적시고 양양을 지나 동해로 흐른다.


마을 어귀에는 삼삼초등학교 부연분교가 보인다. 빨간 지붕의 학교는 학생수가 다섯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홍철수, 선민자 부부교사가 정성tm럽게 교정을 가꾸어 깔끔한 느낌을 준다. 학교의 담은 돌을 주워다가 쌓은 돌담이다. 담 주변에는 소나무가 줄지어 서있어 지나는 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학교에서 점심 한끼를 해먹고 다음 여행지로 가면 좋다. 윗말을 지나 5리쯤 걸으면 아랫마을. 예전에는 가마소 약수터라고 불렀는데 행적적인 지명이 부연동이 되면서 부연약수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약수는 첩첩 산중의 벼랑밑의 개울에서 물이 시작된다. 이 약수를 발견하게 된 것은 20여 년 전 마을 사람에 의해서다. 개울가에 있던 마을 사람이 토종벌들이 자꾸 한 지점에서만 물을 빨아들이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상하게 생각이 되어 그 지점으로 가보니 탄산수인 약수 가 샘솟고 있었다 한다. 물맛이 짜릿하며 톡쏘는 맛이 난다. 탄산약수라 위장병에 좋고 소화를 도와주는 특성이 있다.

윗마을, 아랫마을 모두 합해 마을주민은 10여 가구,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동요 '고향의 봄'과 같은 마을이다.

동네 안으로 맑은 내가 흐르는 이 주변은 야영을 하기에 더없이 좋다. 맑은 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이 마을의 맑은 정기가 가슴 속 깊이 잦아든다.

▶ 찾아가는길

양양으로 일단 간 다음 어성전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성전 사거리에서 qnduds동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고갯 마을를 넘어 마을에 닿는 데 걸리는 시간은 도보로 3시간, 총 거리가 12Km이다.

 

 

9. 삼척 " 덕풍마을 "

삼척군 가곡면 풍곡리 에 위치한 덕풍마을은 들목이 병의 목처럼 좁고 그 품속이 또한 병 내부처럼

넓어지는 특이한 계곡이 있는 마을이다.

무인지경의 협곡이 20리나 뻗어 있고 마을 위쪽으로는 30리나 되는 원시계곡이 펼쳐지는 극지에 덕풍마을이 있다. 덕풍마을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5백년 전. 주민들은 형극의 땅으로 자신들의 고향을 원망하지만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외지인들은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무릉도원으로 예찬하는 곳이다. 태백에서 호산을 경우하여 풍곡을 가면 된다. 풍곡을 가는 길목은 가고천을 줄곧 왼쪽으로 끼고 낡은 시외버스가 달린다.

삼척은 그 어떤 곳보다 계곡이 풍부하다. 가곡천변의 수려하고 깊은 계곡미를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치가 줄을 잇는다. 차량통행이 드문 도로라 시원하게 달리게 된다. 골짜기가 풍부하다는 뜻인 풍곡, 심산유곡에 막힌 오지이다. 종점인 풍곡에서 덕풍마을을 가는길은 덕풍계곡을 그대로 거슬려 오르도록 나있다.

제법 차가 다닐수 있도록 길이 넓어지는 곳이기는 하지만 중간 중간에 계곡을 건너야 하고 계곡 양쪽이 절벽으로 맞물린 곳에서는 서너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소로여서 경운기나 소형 지프등 차가 지나갈 수가 없다. 덕풍을 가고 싶다면 오로지 이십여리를 걷는 수밖에 없다.

마을을 가는 길목은 야생봉숭아와 살구나무가 유난히 많아 이들 나무가 꽃이 피는 5월은 무릉도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곤 한다. 능선과 골짜기 그리고 수림이 저마다 분수를 지켜서 조화를 이루어 이름답게 덕이 넘쳐 보인다. 5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는 동안 인 가를 하나도 만날 수 없다.

여기서 산굽이를 돌면 스님의 칩거지인 산호종사를 만나게 된다. 고개를 더 돌아나가면 덕풍마을이 나온다.

덕풍마을은 10여 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다. 대부분이 3,4대씩 대물려 덕풍에 산 토박이다. 조선 중기때 피난지를 찾아서 선조들이 덕풍마을로 들어온 것은 5백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 분교를 세울 정도의 학생이 되질 않아 분교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왕복 3시간를 걸어 학교에 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전적으로 농사로 생계를 유지한다. 벼, 콩, 황옥등이 주 농사다. 전기가 들어오고 하여 문명의 세례를 받고는 있지만 도로사정이 풀리지 않아 여전히 오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찾아기는길

서울이나 영서지방에서 접근하는 경우에는 호산 쪽보다는 태백시를 경유하는 것이 편리하다.
태백시에 서 덕풍마을의 들목인 풍곡리까지는 하루 10회 직행버스가 다닌다. 풍곡에서 덕풍까지는 걷는 수밖에 없다. 20리 거리로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계곡으로 뚫린 외길이므로 특별히 길 찾기에 어려움은 없다.

계곡을 탐험하고 싶다면 덕풍에서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용소골 입구가 나온다. 원시성이 살아 있는 협곡이다. 용소골에서는 지나가기 힘든 낭떠러지와 폭포가 여러 차례 가로막게 되므로 철저한 준비를 하고 떠나야 한다.

 

 

10. 정선 단임마을

넓은 밭에 온통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단임마을로 가는 길은 길이 매우 좁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버스가 다니지 못한다. 지프차나 승용차는 이 길을 다닐수 있다. 걸어서는 2시간 차로는 30분 정도.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화전민이 살았다는 집터가 보인다. 지금은 모두 떠나 버려 흔적만 남아 있다.

길가의 외딴곳에는 토종벌을 치는 노부부의 집이 있다. 19살 때 시집을 와서 한평생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할머니는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준다. 토종벌을 쳐서 7남매를 출가시키고 이만큼이나 살게 되었다며 여전히 벌을 치느라고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벌통을 만드는 나무는 10년 이상 된 피나무로 만드는데 이 나무를 택하는 이유는 자라면서 속이 비어 벌통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70cm 정도 의 크기로 잘라 속으리 완전히 파내어 양지바른 곳에 설치하여 가을에 꿀을 딴다고 한다.

산모퉁이를 몇 개 돌아 들어가면 폐교된 학교가 보인다. 숙암초등학교 단임분교인 것이다. 이 학교는 80년도에 폐교가 되어 거의 허물어져가고 있다. 창문은 하나도 없고 흙벽은 떨어져 구멍이 나 있다. 학생들이 뛰어 놀던 운동장은 온갖 잡풀이 무성하여 쓸쓸함만 더해줄 뿐이다. 학교의 모습만 보아도 이곳이 오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산자락에 들어선 폐교 주위에는 5채의 집이 있는데 모두 떠나간 빈집들이다. 이곳의 유일한 주민인 이영광씨. 있는 이곳 마을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대의 곳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절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을 가끔씩 들르는 정도라 엄밀히 말하면 단임마을의 주민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북에서 태어나 30년 전에 귀순했다는 그는 서울과 춘천에 이곳에 온지 10년쯤 되었다. 남한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이곳처럼 그의 마음에 쏙드는 곳은 없다고 한다. 그가 이 마을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의 눈빛만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백두산이 보이는 혜산이며 그곳과 비슷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 전국을 떠돌다가 발견하게 된 곳이 바로 단임 마을이다. 9월은 메밀꽃으로 별천지가 된다. 넓은밭에 온통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밭의 뒤편은 초록의 산이 둘러 있어 초록과 하얀색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인 풍경을 그려내곤 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선 아리랑의 발상지 '아우라지'가 있다. 두 갈래의 물이 한데 모여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북쪽의 구절리에서 흘러 들어오는 구절천과 동쪽의 임계에서 흘러 들어오는 임계천이 만나 아름다운 내를 이루고 있다.

▶ 찾아가는 길

단임마을을 가려면 일단 정선을 가야 한다. 정선에서 숙암으로 간 다음 오대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난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 길은 외길로 나있어 그 길을 쭉 따라가면 된다. 오대천 다리에서 단임마을 까지는 걸어서 3시간정도. 지프나 소형차가 다닐수 있는데 차량으로 갈 경우는 30분 소요. 단임천을 계속 끼고 마을 어귀까지 걸어가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11. 의성 금봉리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모여 살고있는 곳

청학산의 모진 산바람이 합세하여 금봉리 사람들을 가두고 있다. 금봉리를 가려면 의성에서 버스를 타고 미골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의성에서 읍의 외곽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버스꼬리를 물고늘어지는 먼지와 함께 오지여행의 기분은 한층 긴장감을 갖게 된다.

비포장 자갈길을 l시간 이상 달리면 전홍동을 지나며 그간 주변에 펼쳐졌던 과수원과 작별하고 좁은 협곡으로 들어선다. 옥산면의 느리미와 새뜸을 지나면서 민가가 없는 계곡이 한참 이어진다.

평범하던 산세가 제법 눈길을 끌 만한 기암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삼거리에서 남쪽 고샅으로 돌아서면 저수지가 나오고 버스는 미골의 골 어귀에 다다르게 된다.

옥산 저수지를 반쯤 돌아섰을 때 버스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서야 한다. 숲길은 저수지에서 소미기골 뒷산의 고갯마루로 곧장 뚫려 있어 상당히 가파르다. 등산하는 기분이 난다. 그런 숲길을 40여분 가야 고갯마루가 나오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숲을 빠져나가는 고원더기가 펼쳐진다.

한없이 이어지는 약초밭. 그 아래쪽에 소미기골이 있다. 마을 주민은 3가구다.
소미기 주변에는 괭이골과 물랭이골, 의방이 등 네 곳의 산촌마을이 있는데 괭이골은 주민이 모두 떠나 텅빈 마을이 되었다.

네 마을 중 물랭이와 괭이골은 골짜기에 들어서 있으며 소미기와 의방이는 청학산 산마루에 높이 솟아올라 있어 세상을 외면한 채 산상세계를 이루고 있다. 골짜기가 워낙 협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다른 곳과 반대로 평지를 만나려면 산 위로 올라가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소미기골과 의방이는 해발 700M 이상의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누대에 걸쳐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 시호, 방풍, 작약, 대황, 당귀, 두충 등 약초와 더덕, 도라지 등의 산채를 주로 재배한다.

주민들이 경작하는 고원 약초밭은 5만여 평. 최근 주민 수가 더욱 줄어 밭을 묵히는 형편이다.
마을 주변은 모두 약초밭 이어서 소미기는 청학산을 넘어오는 거센 산에 무방비인 채 노출되어 있다.

그 강풍을 견뎌내기 위해 건새를 얹은 소미기 집들은 모두 야트막하다. 낮은 지붕에 비해 문턱은 아주 높고 방바닥은 굴곡이 심하여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 정도다.

물랭이골은 70년대부터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어 현재는 빈집이 많다. 청학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청학산. 그 산에 청학이 산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사는 오지인들의 삶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아두고 있다.

▶ 찾아가는 길

의성군에서 금봉리까지 하루 세번 시외버스가 다닌다. 미골을 경유하여 북동쪽으로 뚫린 계곡길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편하다. 미골의 화전민 집단 거주촌에서는 청학산의 골마루를 헐어내고 조성한 의방이 약초밭이 보인다. 미골에서 의방이까지나 소미기까지 올라가는데는 1시간이 면 충분하다.

산 위에 자리잡은 별세계를 보려면 옥산 저수지에서 그 동쪽산을 넘어야 더욱 실감이 난다.
버스가 옥산 저수지의 둑으로 올라선 다음 한굽이를 돌아설 때 내리면 왼쪽 기슭으로 올라붙는 협곡이 나온다.

오른쪽 능선 위에 소미기골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등산을 하면 신천지로서의 소미기골이 나타난다. 등산을 겸한 오지여행을 하고 싶다면 의방이에서 미골로 되돌아오지 않고 청학산을 넘어 안동군 길안면의 유곡이나 명곡으로 내려서면 된다.

의방이에서 출발하여 명곡까지는 3시간 정도. 민박의 경험이 없는 곳이므로 숙박비를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감사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물건으로 성의를 표한다.


 


12. 봉화 홍점 마을

산세가 벼랑을 이루며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깊은 소가 즐비하다.

태백산 남류맥이 청옥산과 각화산의 지겟가지를 벌리면 그 안쪽에 현동 60릿골이 펼쳐진다.
현동골은 잔대미에서 홍제사골의 물을 보태 10여 리 아래의 현동리에서 낙동강으로 흐른다.
이런 지형적 조건에 소천면이 위치한다. 비탈이 심해 한 면의 넓이가 한 군의 넓이보다 넓다고 하면 이곳 땅의 특징을 금방 알게 된다.

게다가 얼마나 외진 곳이면 춘양면과 경계를 이루는 각화산 기슭의 각화사 어름에 태백산사고를 세웠겠는가. 홍제삿골의 끝마을이 홍점마을이다. 인심 좋기로 소문이 근동에 자자하다.

태백을 벗어나 경상도와 의 경계인 돌고개를 지나서 열목어 서식지라는 백천계곡를 넘으면 길고 긴 흰뱅이골이 나온다. 홍제삿골과 만나는 곳에 작은 학교가 하나 세워져있다.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천초등학교 황평분교다. 가르칠 아이들이 너무 적어 폐교되는 운명을 맞은 그런 학교다.

예전에는 40여 가구의 주민이 살았으나 모두 이주하고 10여 가구를 밑도는 사람들이 홍제삿골을 지키고 있다. 홍제삿골에서 홍점마을로 가는 냇가에는 기가 막힌 봉우리가 솟아 있다.

'벼락바우'라는 암봉이다. 몇 년전 도깨비에 홀린 어떤 사람이 이 바위 위에서 도깨비와 밤새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날이 샌 뒤에 보니 간밤에 그토록 마셨던 술이 모두 쇠똥이더라는 것이다.

그바위 아래의 맑은 물에는 피리, 꺽지가 유유자적하며 헤엄을 치고 있다.
이 물줄기을 따라가면 넓은 채소를 가꾸고 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은 언덕 위에 성황당이 멋지게 자리잡고 있다. 반달형의 명당터에 성황당이 있어 그 품새가 그럴 듯하다.

성황당 옆에 집이 한 채있는데 이곳에서 고시 공부를 한사람들이 모두 합격을 하여 명당의 체면을 톡톡히 세워 준다. 성황당은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안을 들여다보면 태백산령 성황지위라는 위패가 있다. 함석집을 지나 왼쪽 골짜기를 1Km 정도 올라가면 신라때 고찰이라는 홍제사가 나타난다.

현대의 건물은 30년 전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 세월의 손때를 느낄 수 없다. 절을 뒤로하고 계속
골짜기를 올라가면 좌우 산세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깊은 소가 즐비하다. 무릉도원의 입구처럼 그 경치가 빼어나다. 애기무덤을 가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면 그야말로
무인지경이 이어지면서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10여리 걸으면 당도하게 되는 애기무덤. 양지쪽 산비탈에 있다. 옛날 어느 때인지 몰라도 이 길을 통해 삼척 땅으로 가던 골 원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데리고 가던 딸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 먼 여행길에 노독이 났던 것이다. 원님은 할수 없이 이곳에 딸을 묻고 갔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벌초를 해주면 복을 받게 된다고 했다. 복을 받기 위해서인지 사람들은 가끔 벌초를 해준다고 한다.

 

 

 


13. 울진 '왕피리'

길목은 맑고 깨끗한 왕피천이 흐르면 허물어진 굴피집도 볼 수 있다.

왕피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통고산의 박달대는 통곡하며 넘어가는 고갯길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왕피리에서 통곡하며 박달재를 넘는 주인공은 고려의 공민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건적을 피해 피난을 왔던 공민왕이 안동과 영양까지 피난을 왔다가 이 고개를 넘으며 통곡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왕피천은 양쪽이 절벽인데다 여러 곳에 깊은 웅덩이가 패어 있어 지나다니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왕피리를 찾는 방법은 봉화행 버스를 타고 불영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삼근리에 하차. 두어 시간을 걸어야 박달재에 오를 수 있다. 삼근에서 왕피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차례 밖에 다니지 않는다. 버스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대부분 걸어서 간다.

30리 길을 걸어야 한천마을까지 다다를 수 있는데 험준한 산세가 보여주는 다양한 풍경을 구경 할 수 있다. 직선거리는 불과 20리밖에 되지 않지만 산이 가로막혀 산을 돌아가게 되어 걸어야 하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주민들은 지름길을 따라 익숙한 발걸음으로는 두 시간 걸린다고 하지만 초행길인 사람들은 찻길을 따라 걷게되면 박달재에 오르는 데만도 두시간이 걸린다. 박달재 일대는 춘양목 자생지로 유명하다.

한 나무에서 전봇대 3개를 끓어내도 아래 위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곧게 자란다는 춘양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고갯마루를 올라서면 왕피천 오지를 감싼 주변의 산군이 펼쳐진다.

한국이 산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동쪽의 대령산, 남서쪽의 금장산과 만나서는 태백산맥의 일월산 등이 첩첩으로 싸여 있다. 박달재에서 남쪽 산록의 급사면을 곧추 내려가면 안골마을이 나온다.

이곳부터가 왕피리다. 왕피리의 본 마을은 안골마을에서 내려가는 지류가 왕피천과 마주치는 지점에 있는 거리골이다. 거리골은 오지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 덜하다. 오지마을의 전형을 보고싶다면 통고산 동쪽기슭에 있는 장재터로 향한다. 능선위로 올라서 고갯마루를 넘으면 장재터가 시작된다.

장재터는 원래 광산촌이다. 그러나 광산들이 폐광되면서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 오지답게 주민 수가 적다. 장재라는 지명은 이 일대에 주석노다지 광이 있어 큰돈벌이 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계곡이 협소하고 물 사정이 넉넉지 않아 땅을 일구며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마을의 느낌은 삭막하다. 농토가 없고 대신 분교 운동장의 녹슬은 슬레트 지붕만이 덩그러니 보인다. 왕피리 안쪽에 위치한 동수곡을 가는 길목은 맑고 깨끗한 왕피천이 흐른다. 길가에는 허물어진 굴피집이 있다.

동수곡에서 한천 마을까지는 약6Km 그 구간은 무인지경이의 원시림이 펼쳐진다. 양안은 거의 절벽으로 일어서 있고 통로는 개울 안으로 이어진다. 가끔 넓어지는 곳마다 집터가 있을 뿐 사람들이 전혀 살지 않는다.

한천으로 들어서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춘양목이 하늘을 가린 고갯마루에 펼쳐지는 양한천 일대의 정경은 한국 오지마을의 전형을 이룬다. 수석 같은 기암으로 이뤄진 하안을 따라 굽이치는 물 맑은 왕피천에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남향에 옹기종기 터를 잡고있는 농가들. 우리네 한국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그런 마을의 모습을 왕피리는 간직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 왕피리는 울진읍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울진 보다는 영주를 경유 하는게 편하다. 영주에서 울진행 버스를 타고 서면 삼근리에 하차하면 된다. 삼근에서 왕피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 한차례 밖에 없다. 도보로 갈 경우 삼근에서 왕피초등학교까지 4-5시간 정도 걸린다. 산으로 들러가지 말고 찻길을 따라 우회를 해야 한다.

삼근에서 동수골까지는 4시간 소요. 삼근에서 박달재를 넘어 학교 건너편 안마을로 들어서 남쪽으로 가로막은 능선길로 들어서면 다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14. 정선 "연포, 소사마을"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 오지 신세를 선천적으로 타고 난 곳

지형적으로 볼 때 동강이 정선에서 시작되고 정선 포구로 유입되면서 끝나게 되는데 이 마을들은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선 쪽에서나 영월 쪽에서나 모두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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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적으로 볼때는 정선군과 영월군 그리고 평창군의 경계가 갈라지는 백룡동굴에서 2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다. 때문에 이마을을 들어가려면 정선이나 영월 평창 어디서건 1시간 이상 시외버스를 탄다음 산길을 서너시간 걸어야 마을에 당도할수 있는 산간오지마을이다. 이 마을을 가려면 신동읍 예미리를 경우해 가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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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구나 고성초등학교 앞에서 하차하여 산을 접어들어야 한다. 협곡으로 들러서서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게 되면 동강과 만나게 된다. 길은 오직 외길.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 뿐이다. 강의 양안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세워져 있어 이방인의 기를 한껏 꺾어 놓는다. 서쪽에 험준하게 솟아오른 신병산을 우회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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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산 동쪽에 원덕천이라는 마을을 경유하여 동쪽 산록을 타고 소동을 지나 2시간 남짓 걸어가면 소사마을 어귀에 다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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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벽의 담배 건조막을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소사마을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외지인을 맞는다. 10가구 정도의 주민이 사는 마을은 밭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전기는 일찍부터 들어왔다. 동강 따라 전신주를 설치하는 것이 용이하여 79년에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는 86년에 가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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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마을의 강 건너편에 연포마을이 있다. 마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이 두 마을 건너다니기 위해 삽다리가 놓여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삽다리란 소나무로 만든 다리로 장마 때가 되면 동강물에 휩쓸려 다리가 없어진다. 두 마을 사람들은 두레를 통해 장마가 끝난 뒤 다리를 다시 놓고 하는 식으로 다리를 매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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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떠내려가는 장마 때에는 나룻배를 타고 왕래를 해야 한다. 연포에 있는 고성초등학교 연포분교로 통학을 하는 아이들은 배를 타고 등교를 하게된다. 소사의 강변은 풀밭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야영을 하기에 더없이 좋다. 유독 굴이 많은 동네라 밤이면 먹이를 찾아 나온 박쥐들이 냇가를 떠돌고 있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냇가에서 보면 연포마을이 건너다 보이고 초등학교의 뒤에는 세 개의 봉우리에 달이 뜨는 모습은 가히 고혹적이다. 봉우리마다 달이 저마다 떠서 달이 세 번이 뜨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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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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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신동읍 예미리를 경유하여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예미에서는 운치리까지 가는 마을 버스가 있다. 그 버스를 타고 평구나 고성초등학교 앞에서 하차하여 산길로 접어들면 된다. 좌측에 이정표가 있다. 6.4Km 정도 도보로 걸어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이 비포장도로는 지프차의 통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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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봉화 두음리 '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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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붉은 소나무는 최고의 건축자재로 각광 받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쪽 산록인 봉화군의 춘양목 삼림지대는 이곳까지 파고든 낙동강의 물길 덕으로 일찍부터 대처의 고대광실을 짓는 목재를 제공해 온 곳이다. 봉화군과 울진군의 군계를 흐르는 낙동강 상류는 봉화군 내로 유입되며 소찬면을 훑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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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음리 듬골은 태백산 자맥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죽미산(907m)과 장군봉(1.420m)의 두 줄기 산 속에 고스란히 갇혀 있다. 이 골짜기를 흐르는 소시천은 들목인 임기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고산줄기가 남북에 만리장성인양 장벽을 두르고 있어 두음리는 오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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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산골오지이지만 고향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춘양에서 임기를 거펴 두음리로 들어가야 한다. 춘양에서 임기까지는 비포장도로로 두시간 남짓 달려야 한다. 임기에서 두음리까지는 버스편이 없어 무작정 걸어야 한다. 10Km의 거리이다. 낙동강에 가로놓인 두음교를 지나 골짜기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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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입구는 남쪽의 제비산과 북쪽 오송골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맞물려 그곳에 30리가 넘는 긴 골짜기가 들어 있다. 입구 마을인 덕거리에서 보면 양 산자락이 입을 대듯 맞물린다.
길변의 소시천은 콸콸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른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인가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주변 산에는 춘양목의 꿋꿋한 기상과는 달리 일반 소나무가 즐비하다. 경운기나 다닐 폭의 좁은 소로 양켠에는 옥수수밭, 콩밭, 고추밭이 연이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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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안을 한시간 반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급히 꺾어지는 산굽이 너머에 두음분교가 모습을 나타낸다. 학교 위쪽으로 올라가면 두음리 본통이 시작된다. 4-5가구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70년대 초 빈집 철거령과 더불어 주민수가 현격하게 격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농사를 지어도 그것을 내다 팔 조건이 여의치 않아 마을 사람들은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이다. 주로 이들이 경작하는 것은 고추다.
마을로 길이 나서 오지 신세를 면해 보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다.

 

▶ 찾아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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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음리 듬골은 그 들목만 찾는다면 쉽게 갈 수 있다. 단지 그 들목까지 가기가 수월치 않을 뿐이다.
들목에 서는 두시간 가까이 계곡 길을 걸어 들어가야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춘양을 거쳐 임기까지 가서 그곳에 덕거리 앞 , 낙동강에 놓인 두음교가 들목이다. 그 다리를 건너 덕거리 마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줄곧 주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두음리 듬골이 나온다.

덕거리 분교까지는 8Km로 두시간이 소요된다. 맨 위쪽 듬골까지는 11Km 주계곡을 따라 올라 경운기 길이 곧게 나 있어 길을 잃을 위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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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인제 '설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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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열목어가 살고 있는 마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 1리부터 70리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해발 1.424m나 되는 점봉산을 뒷산으로 가진 고랭지 마을인 진동2리에 닿게 되는데 그 중심이 되는 곳의 지명이 설피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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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피밭이란 눈신의 일종으로 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위에 덧신는 신발이다. 이런 신발을 신어야 생활을 할 수 있는 특징에서 마을의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혹한과 폭설, 그리고 고립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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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나라에서 화전금지 조치 후 주민들이 급격하게 줄어 요즘은 빈집이 더 많다.
진동 분교의 경우 학생수가 4명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주민수가 적다. 다른 농촌이나 산촌이 다 그러했겠지만 이 마을은 유독 이농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통이 불편하여 생활하기가 어려워서 마을을 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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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의 생업은 주로 자급자족을 위한 감자, 옥수수의 재배와 나물채취, 토종꿀 등이다.
설피마을은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만의 가지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각오하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설피마을로 통하는 입구는 세 군데이다.
양양군 오색초등학교 앞 개울 건너편 계곡을 10리쯤 거슬러 올라 이르게 되는 단목령을 넘어 들어가는 길이 첫번째 방법. 인제군 기린면 진동1리에서 70리 진동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양양군 서림에서 조침령을 넘는 길이다. 위 방법 중 가장 쉽게 가는 길을 단목령을 넘는 길.그야말로 울고 넘는 박달재 신세가 된다. 설피밭의 집들은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맨 윗집부터 맨 아랫집까지의 거리는 20리. 그러나 거리가 멀어도 나누는 정은 따뜻하기만 하다.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오지의 삶을 정겹게 꾸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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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에서 단목령-점봉산-설피밭-진동계곡에 이르는 약 1백리 길은 등산코스로도 매우 좋다.

자연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천연의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차고 맑은물, 울창한 수림, 아름다운 꽃이 한데 어우러져 오지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설피밭은 언제 찾아가도 좋은 그런 곳이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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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출발을 할 경우 한계령을 넘어 오색에 도착.
오색초등학교에서 개울 건너편 계곡으로 곧장 올라가면 단목령 고갯마루를 만나게 된다.
단목령까지는 도보로 1시간 30분 걸린다. 단목령에서 설피밭까지는 도보로 2시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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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동 "논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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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백m위에 위치한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
금남리에서 북으로 난길을 따라 걷다보면 심곡리에 닿는다. 심곡에서 서쪽으로 급하게 꺾어진 우마차로를 5리쯤 걸어가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왼쪽은 사동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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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반시간 이상 지속되는 오르막을 모르면 남쪽에 웅장한 칠성봉이 우뚝 솟아 있다. 잘생기고 장송들에서 둘러싸인 고갯마루를 오르면 마을이 내려 보인다. 바깥 세계에 전혀 자신들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고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마을뒤편 잔솔밭에 등성이에는 대여섯 그루의 큰 당나무가 솟대처럼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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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은 10여 가구 ,젊은 사람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버리고 늘그막에 땅을 부치며 연명하는 전형적인 오지마을이다. 마을의 당나무나 안골 소나무의 수령으로 볼 때 마을이 생긴지가 300년은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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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에 따르면 지리산 남쪽기슭에 3은 3점의 피난처가 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청암면의 고은동(고운동), 오은동(논골)과 묵계의 심은동이 3은동이고 3점리는 풍점리 와 먹점리, 미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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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은 6.25와 지리산 빨치산으로 상징되는 역사적인 사건때 마을사람들이 한명도 다치지 않아 명당의 이름 값을 톡톡히 해낸 바가 있다. 20여 만평의 경작지는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논골이 해발500m 위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면서 한국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농토 덕이다. 논골은 행정상으로 청암면에 속하지만 생활권으로는 악양면에 가까운 면 경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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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남부능선은 삼신봉에 이르러 그 남쪽 산기슭의 청학동과 북계리를 감싸며 좌청룡 우백호의 두 줄기로 갈라선다. 그 좌청룡은 남으로 뻗어 시루봉을 거치며 논골의 뒷산인 깃대봉에 이른다. 깃대봉에 서 남쪽 10여Km 지점에는 칠성봉에 이르는 높은 등줄기는 논골서 악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자연 장벽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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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러 다닐 때에는 이 장벽 가운데 난 맥시골과 배티재를 통하여 왕복 6시간 길의 악양장을 이용했다. 깃대봉 남쪽의 안골에서 시작되는 논골은 반달형으로 논골 일대에서 폭 2Km 정도 넓어졌다가는 남동쪽으로 휘돌아 사동과 심곡 쪽으로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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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 쪽에서의 들목이 되는 심곡도 묵계골짜기로부터 9Km 정도 떨어진 산골이고 보면 논골이 얼마나 산골 오지 깊숙이 박혀 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청암초등학교 심곡분교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리고 중학교가 있는 청암면까지는 편도로 2시간 반이 걸리는 오지이다.
고갯마루 안골까지 4Km에 이르는 농경지의 여러 곳에는 산제밭골, 잔치평전, 웃장구목, 아랫장구목 등의 지명은 윤번제로 품앗이로 모 심고 추수하며 잔치를 벌였던 옛 두레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70년대 초 지붕개량이라는 정부시책에 발맞추던 시기에 마을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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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어 늘어나는 빚더미를 어쩌지 못하고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 50여 가구의 주민이 10여 가구로 줄게 된 것이다.
당나무가 있는 언덕빼기를 경계로 그 북쪽을 음달땅, 남쪽을 양달땅으로 부르며 동구쪽의 공터는 진틀배기로 부른다. 한국의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지의 삶을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18. 경남 산청 "오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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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강이 맑은 물빛이 산청의 산들을 더욱 맑게 그려내는 곳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에서 산길을 한시간 걸어 들어가는 오봉마을의 해발500m에 위치한 산골 오지마을의 전형을 이룬다. 산골 오지가 대개 경로당으로 전락한 것에 반해 이곳은 장년층의 건장한 농군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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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의 이름은 산청군에 솟아 있는 수양산, 기산, 왕산, 팔봉산, 정수산 등의 수려한 외양덕에 붙여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청군이 가진 강 때문이다. 주변 산을 끼고 흐르는 경호강의 물빛이 맑은 산을 거울같이 그려내며 산청의 산들이 강물 속에 맑게 태어난다.
경호강의 상류는 갈수록 맑기를 더한다. 산청읍에서 생초면으로 거슬러 오르는 동안 경호강은 상류의 임천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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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임천강에서 사시사철 변함 없이 해맑은 지리산 계류를 보태는 여러 골짜기 중에 방곡천이 있다.

지리산 북동쪽 끝에 있는 쑥밭재를 주산으로 하고 양쪽으로 뻗어 내린 좌청룡 우백호는 그 소의 산골분지를 감싸며 일대의 산기슭에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방곡천으로 넘겨주고 있다.
그 깔때기 모양의 해발 500m 분지 속에 오봉마을이 깃들어 있다. 오봉이라는 이름은 마을을 향해 사방에서 뻗어 내린 다섯 산줄기에 어원이 있다는 설과 마을 북쪽 산이 다섯 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오봉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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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마을을 가는 길은 협곡이다. 급경사의 고비를 오르자마자 오른쪽 언덕받이에 집이 나타난다. 동구 밖의 화림사 터를 보아도 조선조에 이미 오봉마을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10여가구도 안 되는 사람들이 마을 뒷산인 오봉의 남쪽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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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 적어 논농사는 거의 못하고 담배 농사를 주력으로 한다. 수입이 넉넉지 못해 마을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마을은 오지마을 특유의 인심을 잃지 않고 지나는 길손을 반갑게 맞아준다.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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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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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갈 경우는 남원을 경유하여 산청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하다. 산청서 마천행을 타고 원기나 절터에 하차하여 임천강을 건너 방곡천으로 들어가면 된다. 방곡천 입구에서 오봉 마을까지는 걸어서 2시간.
방곡리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라 길찾기가 쉽다. 방곡리를 지나 200m 나아가면 계곡이 갈라지는 지점이 나온다. 그 다리를 지나 오른쪽 계곡을 줄곧 거슬러 오르면 1시간 안에 오봉에 닿을 수 있다. 오봉마을을 경유하여 계곡을 계곡 거슬러 유평리 대원사나 추성리 벽송사로 넘어가면 좋은 산행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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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양 "빗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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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년 동안 오로지 도자기를 구우며 그 긴 세월을 살아온 마을
이곳에서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이 자체 공급된다. 도자기의 재료인 고령토와 모래질 황토뿐만 아니라 질박한 질감을 내는 유약 원료로 쓰이는 묵보래도 멀리서 가져와야 하는 특별한 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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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발길에 채이는 생활의 터전일 뿐이다. 그리고 이곳의 산지는 1천 2백도 이상의 고열을 내는 재래종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이다. 방곡리 일대의 가마들이 가스불을 마다하고 장작 가마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도락산과 황정산 일대에 아직까지 숲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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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을 벗어나 소백산 기슭에서 만나는 빗재마을. 영동선을 이용해 마을에 가야 한다.
신단양에 내려 점촌이 종점인 버스를 타고 방곡으로 향한다. 방곡행 버스를 타면 단양 8경중 4경을 구경할 수 있다 .길옆에 단양 8경의 하나가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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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리의 삼거리에서 서쪽 피리재를 넘으면 가산리를 지나 차창 왼쪽으로 중선암과 상선암이 있다. 단양 8경은 단양의 산수미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시인묵객이 거드름을 피우며 주마간산격으로 돌아다니며 자그마한 기암절벽이 나오면 시한수로 이름을 붙인 단양8경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내 푯말이 아니면 어느 것이 팔경의 하나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것보다는 단양의 전체 산수미를 감상하는 것이 단양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 도락산을 끼고 시계의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방곡리로 들어서면 단양의 빼어난 산수미를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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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 도락산, 그리도 황정산 등 1,000m고지의 산들이 태백산의 험산과는 달리 한껏 점잖고 수석같이 단아함을 보인다. 중선암을 지나면 협곡으로 변해 마치 길이 끝나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곳을 돌아나가면 평지가 나온다. 벌내에서 남동쪽으로 비포장 도로를 들어서면 문경군의 황정산과 도락산 사이로 난 계곡으로 파고 든다. 이쪽의 경치도 빼어나다.
적당한 크기의 암봉들이 연이어지고 그사이사이는 계절을 잊게 하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 마을의 이름은 성내골. 마을주민이 모두 떠나 무인지경으로 비어있다. 이무인지경의 20리 계곡길은 넓은 반석으로 이어진다. 그 위로 흐르는 찬 계류는 인근의 벌내와 방곡리 주민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곳으로 사랑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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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의 행위예술가 김용문씨가 세운 장승을 만나면 이제부터 오지의 매력이 발산된다.
장승은 방곡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방곡리는 이곳서 10분 정도 걸으면 만나게 된다. 가산초등학교 방곡분교가 있는 방곡리에는 주민수 가 꽤 많다. 방곡리 저잣거리에서 주막 뒤쪽의 북쪽으로 난 경운기 길로 10리를 걸어야 빗재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 길은 소형차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길이 확장되어 지프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면 편하게 마을에 당도할 수 있다. 산길 모퉁이마다 청화백자 파편을 쌓아둔 특이한 돌무덤들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길가에는 질료감으로 파낸 모래 질점토 구덩이가 동공처럼 뚫려 있다. 길가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집은 대개 빈집이다.

빗재마을은 5가구 정도의 주민이 마을을 지키고 살고 있다. 빗재의 어원은 피재다. 구황작물, 고갯마루에까지 피를 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방곡리로 차가 다니기 전에는 빗재를 넘어 사인암리와 직치리까지 나가서 대강 장을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도자기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듬고 세월에 몸을 맡기고 흘러온 마을의 운명. 오지라는 멍에를 안고 있지만 그런 만큼 마을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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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장수 "신기 마을"

유교를 숭상하여 옛 선비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곳
산악분지에 깊숙이 들어앉은 신기 마을은 누대의 농촌 오지가 키워낸 순수한 인심을 자랑하고 있다. 청학동에서 살던 김대중씨가 새로운 이상향을 찾다가 이곳에서 정착하면서 이곳은 새로운 청학동으로 탈바꿈하는 이변을 겪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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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와 진안, 장수 는 전남과 도계를 이룬 전북지방의 최남단의 세 군의 이름이다. 이 세 군의 앞글자만 따서 부르면 "무진장" 이 된다. 무진장이란 한없이 많다는 뜻인데 이곳에 무진장 많은 것은 후한인심. 이 지방어디를 찾아도 주민들의 후한 인심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무진장의 산줄기가 발원하는 덕유산의 드높은 산세를 넘으면 장수군에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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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마을은 장수군의 서쪽 끄트머리를 차지하며 진안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신기에서 강만 건너면 바로 진안군이다. 장계에 서 신기행 버스는 1일 2회밖에 운행되지 않는다.
신기 마을이 버스의 종점이다. 이 마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유불선합일갱유도라는 민족종교를 선봉하는 김대중씨 때문이다. 유불선이란 60여년 전 강대성 교주 부부와 그 아들이 전북 순창군 회문산 금강암에 입산수도하여 유불선을 하나로 합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유교를 숭상하여 옛 선비나 다름없는 생활방식과 서당에서 한문 공부식의 교육을 고수한다. 지리산의 청학동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청학동은 관광지로 전락하여 본래의 취지들이 많이 퇴색되었다. 이런 청학동의 분위기를 떨치고 나와 김씨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다가 신기 마을을 정감록을 통해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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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는 정감록이 예언한 10승지의 한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조의 유학자인 유겸암도 겸암록을 통해 이곳의 지리가 호남 제일의 땅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구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곳이면서 외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특색 때문에 조상들은 이곳을 최고의 땅으로 꼽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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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는 당 할머니께 제사를 지내는 당집이 있다. 수 백년 묵은 듯한 아름드리 괴목이 숲을 이룬 자그마한 동산에 당집이 있다. 수백년간 신기 마을의 안위를 지켜온 것이다.
마을 뒤쪽에는 천반산이 있는데 천반산에 오르면 이 지역의 독특한 지세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시간 남짓 걸린다. 산 정상에는 감투바위가 하나 있다. 치성를 들이는 장소로 이용되는 바위이다.
감투바위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구석구석 굽이치는 신기앞의 금강 상류와 그 강줄기를 둘러싼 주변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기를 중심으로 사방40리가 모두 산맥으로 막혀 있다. 천반산에서는 산 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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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진안의 성수산으로 이어지며 신기 마을을 휘감아 부귀산, 대덕산, 천반산, 시루봉 등을 이룬다. 지룡이 둥굴게 감싼 분지 가운데 신기 마을이 들어앉아 있고 그 마을 앞으로는 주변 산을 피해 산태극 물태극으로 휘감긴 금강이 흘러내려 산수가 제대로 어울린 명당 중 명당이다.
마을 지세와 경관이 뛰어난다 해도 이농 현상은 막을 길이 없었다. 주민은 10여 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 여느 오지와 마찬가지로 교육환경이 열악하여 모두 마을을 뜨고 만 것이다. 이 마을은 아직도 두레로써 함께 산다. 그런 이유에서 인심이 항상 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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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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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에서 북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천천면의 장계리를 경유하면 된다. 장계리에서는 신기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두차례 있다. 천반산 정상은 이일대의 지세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천반산은 별로 높지는 않으나 망벽을 산자락 여려 곳에 두르고 있어 조심해서 올라가야 한다.당집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올라갔다가 능선으로 올라붙으면 옛 천반산의 등산로가 나온다.
3시간 정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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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청송 "내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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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돕고 사는 우리네 인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
제1폭포를 지나 멀찌감치 제2폭포를 두고 주왕산의 명물이라는 제3폭포 쪽으로 길을 잡는다. 2단으로 떨어지는 3폭포 아래의 소 주위는 고즈넉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소를 지나 내원동으로 가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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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국립공원 안, 남쪽의 주왕산 줄기와 북쪽의 금은광 줄기가 큰골을 두 손으로 모은 듯이 감싸고 있다고 하지만 길은 평탄하게 이어져 있어 전혀 산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내원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다섯 그루가 돌탑을 빙둘러서 있다. 당나무에는 금줄이 쳐져있다. 돌로 쌓아 놓은 제단에는 넓적한 바위가 세워져 있고 그 주위는 청솔가지가 둘러져 있다. 당나무 뒤로는 이미 20여 년 전에 폐교가 된 주왕산초등학교 내원분교 건물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옆에는 오두막 한 채가 세워져 있다. 시인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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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길을 따라 몇 걸음 걸으면 펑퍼짐한 밭가에 대여섯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비닐하우스가 있다. 이곳 비닐하우스는 주옹산을 찾는 등산객에게 다리쉼을 하면서 차 한잔을 마시고 갈 수 있도록 주인장 권영도씨가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그가 내놓는 차맛은 혓바닥이 싸하다. 감초, 계피, 진피, 당귀, 박하, 천궁, 건간, 대추, 산수유 의 아홉 가지 약초를 넣고 달인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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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와 전화가 모두 들어오지 않는 곳 내원동, 그러나 인심하나는 확실하다. 한때 내원동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때가 있다. 숯가마도 있고 농사도 잘되어 제법 살만했다. 통나무로 다리를 놔서 3폭포까지 리어카가 올라와 숯을 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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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명동재를 넘어 숯을 팔러 가기도 했다. 아무리 바깥 동네와 왕래가 있었다고 해도 산이 가로막혀 산아래 마을은 천리 먼길이다. 이 막다른 곳 내원동. 가진 것 없고 비빌 둔덕이 없는 사람들이 몰려 든 것은 30년대이다. 70여 호로 마을의 인구가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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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일구어낸 땅이 5만여 평에 달할 정도로 내원동의 살림살이는 규모가 컸었다. 그러나 북적대는 풍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창 번성할 때는 양조장이 생겨날 정도였고 겨울이면 노름꾼들이 찾아들어 마을 주민들의 돈을 축내고 야반 도주를 하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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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전후해서 인민군 낙오병이 찾아들기도 했고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던 김달삼 부대로 불리 우는 빨치산이 장정을 데리고 가면 군경 토벌대들이 들이닥쳐 부역자를 데리고 닦달을 해댔다. 미리 입 막음을 해 감싸고 돌아도 시원찮을 판에 고자질이 예사라 그들이 떠나고 나면 마을에는 원수진 사람들로 또 한번 북새통을 치러야 했다.
또 토벌대가 들이닥치면 큰골 주변 드문드문 있던 화전민들의 집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손바닥만한 내원동 사람들도 6.25 그 어름의 소용돌이를 비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북새통에 살아남은20여 호의 화전민도 20년 전 철거해 주왕산 입구 집단 촌으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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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떠나간 내원동의 그 많던 논이며 밭에는 요즘 억새만 가득하다. 자연스럽게 내원분교도 문을 닫게된 것이다. 시대에 따라 마을은 호황를 맞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 찾아가는 길

주왕산 국립공원 앞에서 길 찾기가 시작된다. 주왕산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가 3폭포 아래까지 간 다음 소를 지나 내원동으로 가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내원동까지 도보로 갈 경우 2시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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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청송 "계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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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마을에서 '진땅'이라는 뜻의 '진땡이' 마을로 더 알려졌다.
계당리를 가려면 안동을 경유하여 길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안에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그 일대에서는 이 마을을 진땡이 마을로 부르기도 하는데 워낙 오지라 그곳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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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마을을 가는 길의 경치는 빼어나다. 십여 미터가 될 듯한 강폭에 비해 여유 있게 벌어진 양안은 동양화에 나올법한 암봉이 연이어져 있고 그 밑에는 냇물과 산수미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버스를 타고 고와동에서 재려 줄곧 길안천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이때 만나게 되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의 이름은 대사동.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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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동 북쪽 끄트머리에는 길송초등학교 대사분교가 있는데 분교에서 700m 쯤 올라가면 계곡이 갈라진다. 왼쪽 골짜기는 상사마을과 오만리로 빠지는 길. 실개천을 건너 오른쪽 골짜기로 1Km정도 들어가면 길이 또 갈라진다. 왼쪽 길이 구두목과 계당리로 가는 길이다.

그곳서 구두목까지는 소형차가 갈 만한 정도의 길이 닦여 있다. 그러나 구두목 입구쯤에 다다르게 되면 과연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로 잡풀이 우거져 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아 길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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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빼기 아래 집이 5채가 있는데 모두 사람들이 살지 않는 빈집들이다. 큰 당나무가 두 그루 서있고 마을은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은 상당히 넓은 분지로 전체적으로는 깔때기 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품이 넓은 노래산은 마을주변에 경작이 가능한 평지를 여러 곳에 펼쳐 놓았다. 당나무 옆에는 조그마한 못이 두개 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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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무에서 동고사를 지내온 선조들은 당나무를 계수나무로 신성시하여 마을이름으로 내세운 것. 한문으로 계당은 계수나무 '계' 자와 '못' 당 자를 쓴다. 못에 물에 댈 정도로 노래산 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았던 까닭으로 인근 마을에서 진땅이라는 뜻의 진땡이 마을로 더 알려졌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면소재지인 안덕까지 80리가 떨어진 데다가 차편이 하루 3번밖에 되지 않는 교통불편 때문에 이 마을은 오지 신세를 끝내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다 떠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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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노래산 산행을 겸한 계당리 탐방은 산행과 더불어 오지여행을 할 수 있는 코스이다.
지경동에서 하차하여 호박골을 거쳐 계당리까지 올라가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된다.
호박골 위쪽에서는 저수지를 지나 20분쯤 오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왼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실개천을 건너면 전화 줄을 만나게 된다. 그 전화 줄을 따르면 20분 안에 계당리에 다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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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홍천 명개리 "아침가리"

몇 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이 마을은 홍천을 거쳐 현리를 지나 창촌리로 접어들어야 한다. 마을의 들목은 광원리. 광원리에서 월둔교를 건너 비포장도로를 쭉 따라 들어가면 아침가리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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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가리를 가려면 명지거리 고개를 거치게 된다. 이 고갯마루에서 보면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 할 수 있다. 1천2백m 이상의 높이가 되는 산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풍광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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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산중의 산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내뿜으며 아름다운 능선미를 자랑하고 있다. 고갯마루에서 좌측으로 가면 구룡덕봉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정되어 있는 야생화 군락이다. 몇 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계절마다 야생화는 다른 분위기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봄과 여름에 특히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좋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곳의 주변은 원시림이 빽빽이 들어 차 있어 꽃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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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이곳 명지거리와 같은 원시림이 두 군데 있다. 특히 이곳을 흐르는 계곡 물이 청정수라 한꺼번에 자연의 진수를 맛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이 청정 지역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곳을 가려면 반드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이다. 길이 나지 않는 한 이곳은 비경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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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군락을 지나면 조경동 조경분교가 나오는데 이곳은 이미 폐교된지 오래된 곳이다. 학교 건물은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외롭게 서있다. 아이들의 웃음이 더 이상 없는 곳.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학교는 쓸쓸함만 느끼게 한다.

분교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 무인지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마을은 오지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을 주민 전부가 타지로 떠났다. 마을은 텅빈채로 아름다운 옛추억을 기억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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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가리에는 가끔씩 사람의 소리를 들을수 있다. 그 주인공은 40대의 한 남자. 그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차마 잊지 못해 가끔씩 이곳을 찾는다. 버려진 밭이 마을 여기저기에 얼마든지 있어 그는 이 곳에 메일을 심어 농사을 짓는다. 진돗개와 한국 토종개 두 마리를 데리고 마을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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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가을이면 그는 여지없이 이곳에 니타나 마을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곤 한다.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된 수달과 열목어가 빈 마을을 지키고 있다. 개울가를 마음대로 뛰노는 수달과 맑고 찬물만 찾아다니는 열목어는 냇가에서 유유자적하게 물길을 거슬러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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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 하늘다람쥐 등도 가끔 얼굴을 내미는 동물들. 사람이 없는 곳이라 이곳은 동물들의 차지가 되어 가고 있다. 아침갈이에서 직진을 하여 고갯마루를 올라가면 방동 약수터가 나온다. 그 곳까지의 거리는 10Km. 방동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을 마시면 가슴 속까지 맑고 시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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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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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홍천을 지나 현리로 간다. 현리에서 광원리행 버스를 타고 광원리 월둔교 앞에 하차한다. 월둔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아침가리를 가는 길목을 만나게 된다. 명지거리 고갯마루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마을의 초입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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