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143-----하남-------------검단산~북문~금암산42

단석 2011. 4. 4. 21:41

 


하남-검단산,용마산,객산21.gpx



                            일반 코스

 



 

 

하남-용마산,빅맥24.gpx




 

 

 

하남-검단산~빅맥42.gpx

 

  

 

 

                                 

   라이딩 코스

 

 

집 - 성내천 - 정수장 - 마방 - 에니메이션학교 - 유길준묘 - 검단산정상 - 산곡초등학교 - 고골 -법화골- 산성북문 - 서문 - 금암산 다운 - 집

 

ALL TIM = 8h      AV = 10.2     MAX = 49

 

검단산 은 그의 멜바 와 끌바로 잔차길은 아님 ㅠㅠ       

황도바지락 칼국수는 좋았음( 육수)

가야할길이 아닌줄 알면서도 스스로 고생길로 접어 무모함에 그뎃가는 예상밖으로 톡톡히 치루었다  .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했거널. 잔차길이 아닌길을 꾸역 꾸역 갔으니.. 누굴 원망하랴 

덤으로  배낭 놔두고 오는바람에 왕복을 하지를않나...ㅠㅠ

고글을 잃어먹지를않나.

후반부엔 홀로 금암산다운길로 외로운 라이딩도 하고.  

 



1 - 마방 에서 회장님과 챔피언님 과.

 


2 - 검단산 초입----아 여기까지는 즐거웁게 갔지만.. 한치앞도 못보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는 꼬락서니란..

 


맨몸으로 등산 하는길로도 고충스러운 곳인데    ,    생기기나 둥글게 잘겼음 안고 품어나 가쥐...

 


탈곳이 없다...끌바와 멜바에 다운은 비례 한다는 법칙에  희망을 안고.....

 


3-- 길도 길이 아니지만 그래도 능선에 올라서니 안도의 한숨이...  그러나  안장에 궁둥이 붙이자 말자 또 내려 끌어야 하고

      붙이는건  잠깐이되  끌고는 끝이 없는 길이라

 


인상 찌푸려 째려본들   누구에게 화풀이할꼬. 자신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고개 숙여 반성하면서도 입에서는 시브랄 시브랄 궁시렁 궁시렁~~~~

 


4 - 전망대  배낭 놔두고 온곳

5 - 왕복 한곳

 고개 숙여 항복은 버~~~~얼서 햬 놓고도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또한번 업조린다

이미 반쯤 들어 섰으니 오도가도 못하고 오로지 앞으로만 가야하니

어디 궁디 붙이고 싱글길 호령좀 할곳이 없나하고 살펴보지만

앞서 보이는건 죄다 칼날같은 바위길에다 경사가 장난이 아니요

 


 

울려고 내가 왔나를 불러보지만 누구하나 도와줄이 없고

어찌나 혼을 빼놓는 길이기에 여기다가 등짐까지 놓고 갔으니...

혼줄에다 봇짐까지 내 팽게치고

도데 무슨  ?  무얼 가지고 갔던가.

 

 

경사각에다----칼날같은 바위길에다----것도 모자란다고 이제는 뻘길까지...............

 


메치고- 등치고- 되돌아가고- 찍히고 - 밟히고-   개떡같은  일은 할것 다하고  여기 까지 오긴왔다.

고개숙여 숨 펄덕이며 정상이라고 들어서자말자- 챔피언님이 건내주는 막걸리 한사발-   목을 넘어가자말자 차가운 냉기가 뼈속까지 스르르 ~~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팔당호를바라보며 엉뚱하게 생각나는건   여기까지 막걸리 어케 저다 날았을까.????

 


나이를 꺼꿀로 먹는건지  원---

 


 

전해지는 이야기

백제 한성시대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 진산(鎭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 전해진다.

또한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을 이곳에 쓰려다 여주로 옮겨가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묘가 있다.

 

검단산의 유래에 대해서 대략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시대 검단선사(黔丹禪師)가 그 산에 은거하였어서 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산(黔丹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검단선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북 고창의 유명한 사찰 선운사(禪雲寺)의 창건 설화 중 신라진흥왕이 세웠다는 것과 백제 위덕왕(525년 ~ 598년) 24년인 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동일인이라면 검단선사가 검단산에 있었던 것은 6세기 중반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검(黔)'은 한자 뜻이 '검다'인데 고조선단군왕검같이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 → '임검(壬儉)' → '임금'이라 불렀듯이 '검(黔)'은 '금'이 되어 즉,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단(丹)'은 현재의 한자 뜻인 '붉다'와는 다른 '제단'이란 뜻으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한때는 검단산의 검(黔)을 '금'으로 읽어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실제로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에 왕이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검단산은 한강과 인접해 있어 산세의 막힘이 없고 동, 서, 북 3면의 조망이 뛰어나며, 남한강, 북한강과 팔당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이 한강에 접해 있으므로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의 집산지 였기에 이곳에서 '검사하고 단속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산 입구에 창우동(倉隅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창우동이란 '창고가 있던 곳'이란 뜻이다.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던 산으로 검단산 일대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 4년 이래 근고초왕 26년까지 무려 370년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위례성을 검단산과 남한산의 북쪽 산줄기 가운데 '고골' 일원으로 추측된다는 얘기도 있다.

 

한남정맥의 지맥 끄트머리에 솟아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운길산, 예봉산과 이웃해 있는 검단산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산 높이는 관악산과 비슷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서 이 산을 '광주목의 진산'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산세가 특이하다. 처음에는 가파르게 고도를 높히다가 마루금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전경이 펼쳐진다-펌_

 

 

저 멀리 보이는 팔당댐

 


정상에서 다운-------자 이제부터는 보상이다.   비례법칙을 철저히 지켜야지  하지만 만만치 않는 길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올라올때처럼 내려갈때도 고개숙여 업조려야만하는 불상사가 생길듯.

                             더 이상 굴복은 없다..  당연히 보상 받아야 할것이고 또 받을거다

 


6 - 우측으로---제법 경사가있고 군데 군데 나무뿌리며 돌뿌리가 ...것도 뾰족한것들이  한가운데 뿌리를박고 버티고 있으니..

 


보드라운 길은 찾아볼때가 없고-   좌 우로 다 쳐다보아도 온통 지뢰밭이다.  한순간 삐걱하여 저 뾰족한 돌 머리에 찍히는날에는

도로아미타불.  굴복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애원해야할...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보상은 커녕 그냥 아무탈없이 내려가 달라고 빌뿐이다

 


베트남 참전기념탑에서 현충탑으로 가야 하는데......유길준묘로 잘못선택하여  빡센 길로.

 


자랑 할만한 곳.....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全勝門 )

                                           북문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그이름을 " 전승문 " 이라 붙였다.

                                          남한산성 북문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있던 산성내의 300 명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따라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성문을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락에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한번 하지못해보고 몰살하고 말았다.

                                        이를 " 법화골 전투 " 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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