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3430-----서산---------- * 가야산34.5

단석 2013. 5. 1. 19:50

 


서산-해미,가야산몽땅.gpx






서산-가야산 연암산50.gpx



 


 

 

서산-가야산,윤봉길,남연군40.gpx


 

해미읍성---윤봉길의사  생가---남연군 묘---용현 자연휴양림---임도 --- 해미읍성

 

 




서산-가야산34.5.gpx                                                  

 

 


라이딩 코스


9 시 57 분   해미읍성 주차장 출발------ 오후 3 시  55 분  도착

 

DST--34.5 km      ALL TIM--5 h 58      이동시간-- 3 h   45

 

평균속도--5.8 km     최대속도-- 65.6 km    평균이동속도-- 9.2 km      상승시간-- 3 h  45      하강시간-- 2 h 04

 

가야산

가야산(伽倻山)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과 해미면,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1]

 

해발 678m로 서산에서는 물론 충남의 서부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이미 신라 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일찍부터 이곳을 서진으로 삼았었다. 남쪽의 산수리에서 석문봉이 되었는데, 석문봉이라 불린 것은 마치 커다란 문을 열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보이는 데서 유래되었다. 가야산에는 일락사가 있으며 주변에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고 자연 경관이 빼어나다. 특히 기암과 능선을 따라 피어있는 진달래와 억새풀이 유명하다...

 

충남 서산시와 예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가야산은 예산, 당진, 서산, 태안 지역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는 산이다. 산은 그 자체로 서해를 향해 호령할 듯 섰다. 산세 또한 그 근방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암산으로 기암들이 징검다리 마냥 하늘을 받치고 있다. 백두대간 칠현산에서 분기한 금북정맥의 산답게 당찬 힘을 발휘한다. 가야산에서 석문봉까지 암릉을 형성한 후 두 줄기로 나뉘어 일락산과 옥양봉, 수정봉을 향해 갈래 친다.

가야산 자락에는 사방 곳곳에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이어진 문화재가 산자락마다 있다. 가야산 서쪽으로는 커다란 은행나무를 품고 있는 고풍스런 해미읍성이 자릴 꿰차고 있으며 북쪽에는 보물 143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는 개심사가 있다. 북동쪽 자락에는 조선시대의 명지관인 정만인이 점지한 남원군묘와 육관대사로 알려진 풍수지리도사인 손석우의 묘가 있다. 그뿐만 아니다. 남쪽에는 충남 서북부를 대표하는 1500여년 된 역사를 자랑하는 백제시대의 수덕사가 명성을 떨치고 있다.

 

-날씨가 맑다. 개떡 같은 날씨가 사다리타기하듯 이어지더니  본년의 기운을 차렷나바

 네비가 길안내를 꼬불꼬불 하는바람에 한차레 삐걱을하고 서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뻥 ~~

차량위에 거치한 관계로 잔차의 저항이  속력을 줄여지고...  허나 계산한 데로 정확히  10 시가 되기전  갈끔하게 해미읍성 주차장에 도착(무료)

서둘러 잔차를 부리고선 보무도 당차게 한서대학교 정문으로 내 달린다.

가야산  나와라----------

 

 

해미읍성 주차장  출발

1--한서대학교 정문 좌측으로 업힐

 


저 돌들을 죄다 모아다가 쌓았다니.....

 


대학교 좌측으로   거러하듯 원룸 촌을 지나자서서히 나타나는 빨래판 업힐   .  하지만 머 초반이라 수훨하게 올라간다

 


언덕비슷한곳 정상?  우측으로 굽이치며 나타나는 다운성으로바선 여기가 1차 정상인듯

직진으로 보이는 반 임도선 길은 솔잎이 카펫처럼 깔린 포근한 길로 보인다.   유혹을 하지만  우린 우로 내려꼿는다.

 

2--전망대

 

 

 

3--우로 일락사로          좌로내려가면  12 번  황락저수지로 지나 해미면으로 가는길이다.

 

 

4--일락사 주차장

 

5--사잇고개               3 번 삼거리에서 여기까지  1.7 km   초보자면 거품 좀 물듯  쉬운 업힐은 아니다

 

 

 

 

 

5--사잇고개

 

6--삼거리 직진            좌측으로가면  11 번 삼거리 로 가는길

                                고개에서 여기 까지 1.6 km

 

7--용현자연휴양림           좌측  우측을 교대하며  청청 계곡을  나란이 신나는 다운을 한다       삼거리에서 1.9 km

 

8--마애여래 삼존상 가는길

 

 

잔차를 메고 올라가지를못하고 퍼온사진으로 대체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8--점심  맛집      보원사지에서 여기가지  1.3 km

 

9--서산보원사지

 

 

 

 

 

단아하게 ,

정숙하면서

자만하지도 않고

그리고 위엄있게

자리를 하고 있구나.

 

그많은 세월의 비바람에도

천둥에도

너는

의젓하게 지켜 왔구나

 

기둥이 넘어지고,

기와가 깨어지고

석가래가 진을 뿜으며 불에타 재가 될때도

너는

흔들림이 없었겠구나.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보았을것이고

한줌 보리쌀을 내밀고

두손모아 빌고 있는 힘없는 울 할매도 보았을것이제.

 

혹...

흥선대원군이 불상을 때려부수는걸 보았나...

금탑을 도끼로 부셔 땅속을 묻는걸보았나...

 

모든걸 보기싫어 가야산으로 돌아서버렸다는

석불을 보고싶다.

 

 

 

 

 

 

 

 

9--싱글 등산로로 멜바

10--삼거리 좌로        9~10  라이딩 길은 멜바 끌바 등산로 싱글이고    적색선은  골짜기로 들어가 임도 타고 목장 철책경유 다시 임도 로 오는길

 

 

 

 

11--삼거리 직진     좌측은  6 번과 만나는길

 

 

12--삼거리 도로만남 우측으로 저수지끝

 

 

도착 해미읍성

 

서산 해미읍성 종 목 사적 제116호

명 칭 : 서산 해미읍성 (瑞山 海美邑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 194,102.24㎡

지정(등록)일 : 1963.01.21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사유

관리자(관리단체) : 서산시

 

서산 해미읍성에 대한 설명입니다.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남연군 묘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1822)의 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지사(地師) 정만인에게 남연군의 묘자리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정만인이 2 곳을  지목한다 .

   

 -  한곳은 오서산 자락으로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자리인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  또 한곳은 여기 가야산 자락  2대에 걸쳐 천자(황제)가 나올 자리인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흥선군은 주저없이 가야산자락 여기를 선택을 하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다.

 

연천에서 이곳까지 먼 거리를 상여가 도착되는고을마다 주민들이 차례로 상여를 옮겼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주지를매수하여  절을 불태우고   탑을부수던 인부들이 천둥소리와 검은먹구름이

 

몰려오는현상에 무서워 일을 멈추자  도끼를 든 대원군.. 

 

" 이나라 모든것은 이씨왕족 것" 이라면서 직접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한차례의 도굴이 있을것이라는  정만인의 말을 듣고

 

관위에 석회석으로  돌보다 더 단단하게 덮은후에 봉분을 만들었다 합니다.

 

이장한지 7년후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12살되던해 철종이 후사없이 죽으므로 가까운 종손이었던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이고 그다음이 조선왕조 최후의 왕인 순종이 됩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쇄국정책으로 나라문을 꼭꼭잠그고 치국 할때

병인양요나 신미양요같은 외침도 있었지만,

쇄국의 문이 열리지 않자 독일상인 '오페르트'란 자는 교역을 못하게 되자 대원군의 아버지

묘소를 파헤쳐 협상 또는 분풀이를 하는 이른바 '남연군묘 훼손사건'을 저지르고 맙니다.

 

독일상선을 이끌고 상해를 출발하여 지금의 서해대교 아래 행담도에 정박하곤

여기에 있는 남연군 묘를 파서 시신을 가지고 협상할 계획으로 야밤침투하였는데,

관을 꺼내기엔 석회석이 너무도 돌같이 단단하여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한다.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남은들상여(남은들喪輿.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로 행상, 영여, 온량거라고도 한다

 

. 남은들 마을입구의 상여막에 보관되어 있는데 보통의 상여막에서 처럼 상여를 해체하여 보관하지 않고 조립된 그대로 관람하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 싶다.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또한 대원군이 세도를 얻기 전에 제작된 것이므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숙종 대의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사진 및 글 출처:문화재청)

 

 

 

득도굴

 

원효봉 올라가기전 득도굴---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먹고 깨달아 당나라유학을 포기 했다는....

 

 

 

 

 

--남연군 묘 에서 우측으로 500 미터 떨어진곳에  현대의 명지관이라 불렸던 손석우 씨 묘가 있다

 

 

육관 손석우

1926년 경북 울진군 기성리 다천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고 한다

호적에는 1930년생으로 늦게 올려져 있다고 하며 소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할수 없어 농사를 지으며 70리밖

선배의 집에 찾아다니며 독학으로 교원 자격고시에 합격하여

한때 울진 사동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군에 입대, 1957년 장교로 제대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장준하선생이 주필로 있던 사상계 잡지사에서 근무하던중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정치에 뜻을 품고

민주공화당 울진지구당 위원장이 되어 박정희 후보를

마포 집을 팔아가면서까지 도왔으나 공천을 받지 못하자 분개하여

공화당을 탈당하였으며, 정치와 세태의 각박함을 경험후,

오대산 적멸보궁 밑에 움막을 짓고 8일동안 기도를 하던중

혼절하여 스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산을 내려오면서

땅속에 뱀이 엉켜있다거나, 묻혀있는 권총이 보이는등

땅속을 유리속 같이 보는 신통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저서 '터'나 언론 인터뷰등에서 자칭 당대 최고의 풍수라며

풍수지리는 학문과 이론이 아니라 땅속 수 십 미터를 볼 수 있는

神眼이 있어야 혈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의 눈만이 혈을 찾을 수 있는

神眼을 가진 도사라고 거침없이 말하던 인물이다,

오늘날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그가 일반인에게 신비감을 줌으로서

고조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풍수지리를 왜곡하여 혹세무민하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가 유명해지게 된 몇가지 사례를 보면

ㅇ 전주 모악산에 김태서의 묘를 보고 전주김씨 후예인 김일성이

49년동안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1994년 9월14일에 운이 다한다고 예언했는데

1994년 7월8일에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죽자 일약 유명해졌다

ㅇ 1978년 이순자 여사의 조부인 이봉희 옹의 묘를 망우리공동묘지에서 파분하여

용인 내사면 금박산에 이장하며 이혈은 학이 날아가는 형국이라

곧 왕비가 나온다고 하였다고 한다

ㅇ 용인시 묘봉리에 김대중대통령의 부모 묘를 이장시키며

그곳은 天仙下降의 지세로 天仙이 내려오니 흩어진 인재들이 모여들고

좌절됐던 일들이 복구되는 특성이 있어 여기에 묘를 쓰면 자손중에

반드시 큰인물이 나며 하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하면서도

돈때문에 끊임없이 문제가 될수 있다고 예언 했다고 한다

 

 

 

김일성 사망 예언 등으로 화제를 모았던 지관 손석우씨가 의문의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생전에도 세간의 평가가 엇갈렸던 손씨의 장례식은 부고도 없이 은밀히 치러졌다. 게다가 도립공원 안에 묘지를 불법조성한 사실까지 밝혀짐으로써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그 소문의 진상과 문제가 된 묘지 불법조성의 전말 등을 취재했다.

생전에 북한 김일성의 사망을 예언하고 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 가족묘터를 잡아줘 화제가 됐던 풍수지리가 육관(六觀) 손석우(孫錫佑)씨가 지난 8월26일 세상을 뜬 후에도 숱한 이야깃거리를 낳고 있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대로 손씨의 묘는 묘지 조성이 금지된 도립공원 안에 조성돼 관할 군청으로부터 이장(移葬)을 요구받고 있다. 남의 명당을 잡아주던 지관(地觀)이 정작 자신의 묘가 이장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아이러니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손씨 가족들은 묘지 불법조성과는 별도로 사망원인을 둘러싸고서도 한동안 밑도끝도 없는 소문에 시달렸다. “묘터를 보러 산에 오르다 벼락을 맞고 비명횡사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처럼 흉흉한 얘기가 나돈 것은 무엇보다 가족들이 손씨의 사망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일가친지들에게조차 부고하지 않았다. 서울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문상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발인도 새벽 3시에 했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장지에서의 하관절차도 아침 6시 무렵에 서둘러 마쳤다. 손씨의 장례는 이처럼 생전의 명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치러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손씨의 사망 전후 정황은 어떠했고, 가족들이 쉬쉬하며 장례를 치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손석우씨가 서울 용산구 보광동 자택을 떠나 경주로 내려간 것은 8월26일 아침. 수년 전 자신이 직접 관명(觀明·묘터의 운세를 보는 일)한 울릉도의 묘지를 전남 해남으로 이장하는 데 지관역을 맡기로 하고 지방출장길에 오른 것이었다.

이튿날 포항을 거쳐 울릉도로 들어가기로 하고 26일 오후 경주국민호텔에 투숙한 손씨는 밤 10시경 호텔 객실에서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켰다. 호텔 직원들의 신고로 출동한 불국소방파출소 구급대에 의해 계명대 동산병원으로 후송되던 손씨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 구급차 안에서 절명했다. 병원측이 발부한 사체검안서상의 사인은 ‘심폐기능부전’이었다.

언론 피해의식 심했던 생전의 육관도사

나이(70)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던 손씨는 지난 여름 심장병 증세로 쓰러져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보름간 입원치료받은 적이 있었다. 건축자재업을 하는 둘째 아들 광진(34)씨의 부도 후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친 게 손씨의 심장병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었다.

손씨의 유해는 사망 다음날인 8월27일 저녁 서울 순천향병원 영안실로 옮겨졌고, 29일 새벽에 발인해 자택 부근에서 심야 노제(路祭)를 지낸 다음 예산 장지에 묻혔다. 이처럼 쉬쉬하면서 장례를 치른 결과, 손씨의 사망사실은 사망 보름이 지난 9월12일 독자의 제보전화를 받고 사실확인을 마친 한 신문보도를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가족들은 손씨의 사망 사실을 숨겼던 이유를 “언론에 알려지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명당(明堂)만 찾아다니던 사람이 묻힐 곳은 도대체 얼마나 명당이냐”는 일반인들이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면 망자(亡者)를 조용히 모시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가족들이 걱정한 것은 이처럼 ‘긍정적인 관심’이 아니었다. 충남 서산시 해미읍에 거주하는 손씨의 제자 조모(44)씨는 “언론이 선생님이 돌아가신 사실을 알면 별별 얘기까지 다 끌어모아 보도할 게 뻔한 상황이라 장례를 최대한 은밀히 치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대다수의 역술인이나 풍수지리가가 그러하듯 ‘육관도사’ 손석우씨도 언론보도를 통해 대중적 지명도를 얻은 경우였다. 그러나 손씨만큼 언론으로 인한 호된 곤욕을 치른 경우도 드물었다. 특히 지난해 4월 MBC-TV의 ‘PD수첩’이 손씨의 지관으로서의 능력과 돈 문제 등에 대한 의혹을 담은 ‘육관도사의 위험한 풍수’편을 방송한 후로는 손씨와 가족들의 언론기피증은 한층 두드러졌다. 이러한 경험 탓에 가족들은 손씨의 사망을 계기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28년 4월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한때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던 손씨는 62년 정치인의 꿈을 안고 민주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공천을 받지 못해 선거에 출마해 보지도 못한 채 정치에의 꿈을 접어야 했고, 정치권 언저리를 오가는 과정에서 집안살림만 축낸 것으로 알려졌다. 손씨는 이후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오대산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신안’(神眼)을 얻고 나서 풍수지리가의 길을 걷게 됐다고 생전에 밝힌 적이 있다.

손씨가 매스컴으로부터 ‘주목’받은 것은 94년 초에 펴낸 “터”라는 책에서 김일성의 사망을 예언했다 이것이 적중하면서부터였다. 손씨는 이 책에서 ‘김일성의 운이 올해 음력 9월14일을 기해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같은해 7월 숨지자 손씨는 ‘김일성의 사망을 예언한 역술가’로 각광받았고, 그후로는 각종 매스컴이 연말연시 등을 맞아 ‘올해의 국운’ 등을 점칠 때 반드시 한 말씀을 얻어야 하는 인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손씨는 95년 5월 야당지도자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이 경기도 용인에 가족묘역을 조성할 때 그 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선친과 모친, 여동생, 사별한 전처 등의 묘가 이장돼 있는 이 가족묘역은 지난해 대통령선거 후에는 ‘대통령을 낳은 명당’으로 소문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구경오는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김대통령 가족묘와의 인연은 손씨에게 ‘대통령을 배출한 명당을 점지한 지관’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지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손씨의 삶은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손씨는 ‘명당은 공짜로 봐주는 게 아니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단 한푼이라도 대가를 지불해야 땅의 복이 제대로 발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에서 손씨는 관명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돈 얘기를 꺼냈다. 이러한 언행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지관이 너무 돈을 밝힌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손석우에게는 이미 쓴 묘를 보다 좋은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이러한 의뢰에 응할 경우 기존 묘의 운세를 먼저 봐주고, 이장할 명당을 물색해주는 순서로 일이 진행된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손석우씨의 묘. 손씨의 가족들은 군청측의 원상복구 명령을 받고 소나무를 베어냈던 묘지 주변(위)에 다시 나무를 심었다(아래).

그러나 이장할 명당을 점찍어주었지만, 사정이 생겨 의뢰인이 그 땅을 사지 못할 경우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산주(山主)는 자신의 산에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서는 걸 꺼리기 때문에 아예 땅을 팔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고, 팔더라도 시가보다 엄청나게 비싼 돈을 요구하기 십상이다. 일이 이처럼 꼬여 이장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는 “이장이 불가능해졌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잦았다. 기존 묘의 운세를 봐준 사례비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분쟁은 또다른 잡음을 낳는 빌미가 됐다.

지금의 묘는 지난해 假墓 써두었던 자리

전국의 산을 두루 살피고 다니는 과정에서 손씨는 자신의 명의로 임야를 직접 구입하거나 매매를 중개하는 일도 잦았다. 이 과정에서 계약조건과 잔금 지급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했던 손씨는 자신의 제자를 자처하며 좋지 않은 소문을 일으킬 경우 가차없이 인연을 끊었다. 실제로 풍수지리가연하며 손씨 집을 출입하다 이러한 연유에서 손씨와 단단히 의가 상해 결별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손씨를 좋게 얘기하고 다닐 이유가 만무했다.

지난해 방영된 ‘PD수첩’은 손씨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논란을 모아 손씨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 전에도 ‘땅에다 무슨 물건을 숨겨놓았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식으로 매스컴이 접근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던 손씨는 ‘PD수첩’이 방영된 후에는 극도의 언론 기피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가족들이 최대한 조용한 장례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결국 사망사실을 보도하고, 도립공원내 불법묘지 조성문제까지 제기하고 나서자 손씨 가족들의 언론에 대한 피해의식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외부 전화를 피하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수시로 바꿔온 차남 광진씨는 이제는 아예 다른 사람 명의로 개설한 전화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얼마 전에는 한 주간신문이 ‘생전의 손석우씨가 김대통령 가족묘터를 잡아주는 대가로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는 기사를 실어 가족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손씨의 묘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104 임야는 손석우씨가 지난해 3월 충남 당진에 사는 장모씨로부터 사들여 차남 광진씨 앞으로 등기한 사유지다.

손석우씨는 지난해 3월 현재 자신이 묻혀 있는 임야 1만7천평을 매입한 직후 평소 교우하던 풍수지리가 조제운(曺濟雲)씨에게 부탁해 자신의 묘터를 잡았고, 같은해 9월 석관으로 가묘(假墓)를 썼다. 손씨는 가묘를 쓸 때 부부합장을 염두에 두고 부인이 묻힐 자리도 함께 잡아놓았다. 현재 손씨의 묘 속에는 부인을 위한 빈 석관이 하나 더 묻혀 있다는 얘기다. 손씨의 묘터를 잡은 조제운씨는 “육관의 묘는 주변 산세가 용이 살아서 각 방향으로 날개를 펴는 형상인 데다, 묘터 앞에는 물이 드나드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저수지가 자리잡아 만대의 복을 발하는 명당”이라고 밝혔다. 조씨는 이 터가 ‘꿩이 매를 피해 내려앉아 웅크리고 있는 지세’로, 명당의 필수조건인 ‘힘을 받는 자리’라고 덧붙였다.

도립공원 안에 묘를 씀으로써 손씨의 가족은 자연공원법, 묘지 및 매장에 관한 법률, 산림법 등 세 종류의 실정법을 위반한 상태다. 관할 예산군청은 이 가운데 상위법인 자연공원법을 적용해 그동안 세차례에 걸쳐 ‘덕산도립공원 가야산지구내 불법행위(묘지설치)에 대한 원상복구 명령’을 차남 손광진씨 앞으로 발송했다.

군청측의 원상복구 명령에 대해 가족측은 지난10월 중순 잣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심어 96평 중 봉분을 제외한 77평을 원상복구했다. 그러나 예산군청은 11월15일까지 묘 이장을 포함한 완전한 원상복구를 요구하는 명령서를 발송했다. 예산군은 이 기간이 지나도 원상복구가 이뤄지지 않으면 가족들을 불러 청문 절차를 밟고 곧바로 경찰에 고발한다는 방침이다. 경찰고발과 검찰의 기소를 거쳐 정식재판을 받을 경우 손씨의 가족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손씨의 묘가 다른 곳으로 이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가족들의 입장과 관련법규 등을 감안해 보면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손씨의 가족은 “도립공원에 묘를 쓰는 게 불법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매장한지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묘를 이장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입장이다. 손씨의 가족을 대리해 군청과 접촉해온 제자 조씨는 “도립공원 안에 있는 묘지가 한둘이 아닌데, 이번의 경우만 문제삼는 건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군청측은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나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정황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법대로’ 처리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묘지 이장될 가능성 희박

그러나 현행 법규에는 묘지 불법조성에 대한 처벌을 받고서도 계속 이장을 거부할 경우 행정당국이 강제로 이장을 집행할 권한이 규정돼 있지 않다. 불법묘지의 경우, 땅 주인이 묘지 연고자를 상대로 강제이장이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손씨의 묘는 땅 주인과 묘 연고자가 동일인이기 때문에 소송이 성립될 여지도 없다.

손씨의 묘는 예산군이 지역기념물로 관리하는 남연군 묘에서 불과 5백m 거리에 있다.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는 그 자리가 천하명당임을 안 대원군이 이미 세워져 있던 절을 불태워 없애면서까지 묘를 이장한 곳이다. 남연군 묘는 덕산온천과 더불어 예산군의 대표적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손씨의 묘가 부근에 있다는 게 알려진 후로는 남연군 묘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손씨의 묘까지 둘러보고 있다. “육관도사가 묻힌 땅이 얼마나 명당인지 보자”며 일부러 먼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처럼 손씨의 묘가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하자 예산의 향토인사들 사이에서는 “묘를 이장할 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 양성화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덕산온천지구, 남연군 묘 등과 연계해 홍보만 잘 하면 군의 살림살이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산군청의 한 간부는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얘기지만 법규상으로는 수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밝혔다.

손씨의 묘가 일부의 희망대로 ‘양성화’되는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도지사가 묘터 일대를 도립공원지정지역에서 해지하고 용도변경 절차를 거쳐 공원묘지로 개발하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임야 소유주 또는 묘지사업자가 엄청난 개발이익을 얻게 돼 특혜시비를 낳을 게 자명하다.

처음부터 공원묘지 개발이 시도되었다면 몰라도 불법조성된 특정인의 묘를 양성화한다는 명분으로 행정기관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일을 추진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씨의 가족은 당국이 묘지를 이장하지 않아도 되게끔 ‘선처’해준다면 가족 소유의 임야 일부를 노인복지시설이나 청소년수련장 등을 건립하는 데 활용할 수 있도록 희사할 뜻이 있음을 조심스레 내비치고는 있다.

그러나 가족들의 희망이 실현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은 게 현실이다.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일세를 풍미하고 간 풍수지리가 손석우씨의 묘는 당분간 세간의 논란의 대상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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