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355-----남양주-----------광해군.사릉.문재산66

단석 2013. 5. 5. 22:34

 


 

 

남양주-광해군.사릉66.gpx

                                                                             

 

2--왕숙천을 가다가 한양대 축구장으로 진접을 향해 좌측으로 간다

3--진접 중국집

4-- 고개에서 내려가다가 우측 주유소 지나자말자 신호등을건너 좌측 동네로 들어간다

 



아침 6 시에 일난다    어제 저녁  맘에둔  광해군 묘와 그 어머니  공빈김씨묘    임해군묘

그리고  2009 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된 조선 왕 40 중 (2기는북한소재)    2013 년 1월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한  사릉 으로 향한다

 


가는도중 구리 한강변   유체꽃이 반개 하고

 


 

각종 꽃이 지나는 과객의 발걸음을 더디게한다.   오호  아름다운지고

 

 

이른 아침이라 열혈사진사 몇명만 보이나..

조용하게 맘것 꽃을감상하고

 

 

 

 

 

 

 

 

막대기 폼도

 

 

 

그리곤 열나게 밟고 밟아  진건읍에 도착      너무 열나게 온관계로 배가 살짝 고파서  10 시 30 분인데도    몇일전 와서 맛본 그곳

자장면 집에서 이른 점심을묵고

 

우측 진건 쪽으로 방향을 틀어 업힐

 

5-- 우측으로  영락교회 묘지로 간다   직진은  견성암 가는길

     업힐 좋아한다면 견성암 도전도 한번 해볼만   빡세기로 둘째라면 서러워한다나 머래나

 

6--영락교회 묘지 후문 도착  좌로 올라

 

묘지전경

 

 

7--좌측 철망 쪽문을열고 들어가면 광해군 묘다

 

 

광해군(조선15대 임금 1575~1641    이름은  혼 琿  )

 

그는 다들 연산군과 함게 폭군이라고 하지만  내가볼적에는 더할나위없는 성군이다.( 성공한 쿠테타에 의한 역사조작)

제위중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회복하는데 힘썼고

저물어져 가는 명과 뜨오르는 후금 사이에  아슬 아슬한 줄타기 실리  외교로  나라를 지켰으며,

한편으로는 침략에 대비해 대포를 주조 하고   국방을 강화 하면서 내적으로는 대동법등 부강의 나라로 향해 온 힘을 쏱았던

17 세기 시대변화를 앞서 읽은 선구적 임금이였다.

어쩨서 거런냐고?   앞으로 논하겠다.

 

 예길 할려고 한다. 물론 모든게 다 내 주관적 으로 시부릴것이다.

나는 역사 학자가 아니다. 구냥 한 소시민일뿐이니 역사적 사실과 다를수도 있다    오해 마시길

광해군을 야기 할려면  먼저 선조를 예기 해야 하는데  갠적으로 선조... 붕신같은왕으로 생각하무로  길게 논하지말자

 

한마디로 표현 하자면  왜놈들 한데 땅내주고  나라고 머고 체면이고 머고 생각도없이 백성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게치고

요동으로 명나라로 도망 갈려고 했던 넘이다.   나뻔넘  논하기조차 싫다.   중요한건   선조도 서자 출신 이라는점이다

요것 컴플러스 때문에 역사를 뒤죽박죽 만든다.(영창낳아 당쟁 으로 어지럽게 함)

 

광해군만 하자

선조는 첫번째 마누라(의인왕후박씨) 에는 자식이없었다.

광해군은 2 번째 첩 공빈김씨  ( 첩이 무지많다)  사이   두번째 아들이다            1 번 째 아들은   임해군.  년년생이다

한데 선조의  아들이 전부 몇명이냐.... 자그마치 13 명이다.     이런 제길슨

그 13 명 중에서 광해군이 젤 똑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천재였던것이다.

 

위에서 본 묘지.  조선왕의 무덤치고는 너무 작고 초라하다 

 

 

선조는 자신이 서자였으므로  담세대는 꼭 적자에서 장자가되길 바럣다 (서자는벼슬도 못하는시대에 왕이되었으니 서룸 받지) 

적자는없고 다음 서자중  장자면 누구인가 바로 임해군이다.

임해군...  이넘   에 대해선 임해군 묘지에가서 다시 하기로 하고 요약하면 어릴적부터 폭군으로 소문이 난넘,

해서  임해군은 이른새싹부텀 싹수가 노랗다고 새자 책봉 가능성에서 제외...  이러니

 선조가 이넘 저넘 견주다가 결국  자기 컴플럭스를 감추기위해  적자 장자를얻기위해  새 장가를간다

 

여기에는 아마도 이랬을것이다

명. 당시만 해도 명은 군이요 조선은 신하였다           아~ 쪽 팔려

명 황제가  선조한데  전화를때린다

- 여보시오  아  나 명 황제인데

- 아   네 황제님  저 선조임다

- 선조 임다 가 머야 임마 임다가....   당신 말이야 서자 출신이지..?    거러니 말을 꼬다구 밖에 못하지비

 

개++  남의 임금한데 반발이나 찍찍하고....  여기에 열받은 선조.

 

그래서 선조는 죽으라고 적자 장자를 왕위에 앉일려고 기를선다.    그래서  그래서    마누라 를 얻는데( 60 대 왕과 10 대 왕후 )

그 마누라가  음 황후지 즉 인목대비다     그 왕후가   아들 광해군보담 9 살이아 적다는것이니 -- 

 9 살이나 적은 애한데 엄마라고 불러야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

 

또라이같은 상눔 같은넘  일개 국왕이 말야  지 아들 보담    .... 참나 기가막힌다.  그시대는 그지위면 가능한일 인가.

지금 같으면 아무리 왕이지만 10 대 미성년이니까 원조교제 로 철창행이다

 

암튼 그  인목대비.........  애가   애를낳으니   가가  곧  영창대군이다.

말하자면 적자다..  선조는 좋다고 지랄를 떨고  핏덩이안고  생쇼를한다.

얼시구 절시구 임금났다고  춤추면서  한편으로  세자인 광해군을  홀데하는데.

 

아침 ---평상시와 같이 광해군은 아침문안 인사를드린다.

 

- 아부지 저 광해인데요  잠 잘 잤습니까..?

    여기에 선조 영창대군을 생각하고

 

-니가 임마 먼데 나한데  인사오노  니 세자자리는 잠시  임시직이니 인사 오지말거라.

 

  여기에 열받은 광해군은  피까지 토했다고 실록에는전한다.      울메나 승질 났겄나..

 

 

 

적자니 장자니 하는사이에  이웃 왜놈들은 일찌기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선진화되니 ( 데오레.엑스티 엑스티알 같은 잔차부품을 개발)

 만만한 조선을 계속 찝적거린다.

그래서 남쪽에서는 왜군 천지다    ( 20만대군 ) .. 땅 뺏기고   조선 처자들 뻇기고    돈뺏기고    땅 뺏기고..............이런상황.

 

이순신이나 제데로 믿었으면 그래도 좀 괜찮았을터인데   이새끼 저새끼 간신배 말 다듣고  귀향이나보내고 하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병신새끼   왜놈이 쳐들어오면 맞서서 싸울일이지   아고 무서버 하면서 의주로 도망간다---선조실록

임금의 피난소식을들은 백성들이 본노하여 노비문서를 맡고잇는 장예원을 불지른다----선조수정실록에 전한다

 

뒷수습을 누가하나...

 

바로 광해군이다 .  그 좋은 머리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의병을 귀합하여  과감히 왜놈과 싸우는데.

"적도들이 무너졌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다"-----라고 선조실록에 전한다

 

잘한다.  백성들과  머리 똑바로밖힌 신하들한데 칭송을듣고  명나라 부터도 칭찬받는다.

명나라야  조선은 지들 신하인데 왜놈한데 뺏기면 안되니  좋타 하겠지.

광해군  잘 한다 짝 짝짝~~~

 

아들한데 왜놈과 싸우라고 놔두고 사이클타고 멀리 도망친 선조는  이런상황을 시기한다.   아직 대글빡 피도 안마른 영창만 생각하고...

해서  하루빨리 영창을 세자로 책봉할려고 서두르는중

어느날  점심때   찹쌀밥 묵고 목에 걸려서 죽는다. ( 붕신 같은넘 죄 받았다 )  선조 41 년

 

교서는 유영경 이라는 영의정한데  광해군을 후계자로 한다고 하구선

숨 넘어가기전  까지  다른비서 한데 쪽지를준다   영창을 왕 시키라고  부탁한다고...

거런데 그 비서  똑똑한넘이다  애국자다             쪽지 ..........찢어 없에버린다. ( 잘 했어....)

광해군일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상께서 기가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엇다"

 

 

 

선조가 졸지에 죽자  영창이다 광해다 하고  분분하지만  어린 영창한데 나라를 맏길순 없는일. 결국 광해군으로 낙점.

 

거런데  이런 욕나오는일이.  이번엔 명나라에서 제동을 건다.  당시만 해도 세자나   왕이 될려면 명나라한데 허락을맏아야 한다

 

이게 무신 나라야....

 

생각해보면  명나라는 반대하는 이유가 명분은  장자가 아니라는이유지만  속으론  광해군이 쌈도 잘하고 너무 똑똑 하다는것이다.

 

속국인 나라  왕이 너무똑똑하면 말을 잘안듣고 피곤하잔아..  그래서 반대 하는거야   왜놈하고  싸울때는 잘한다고 칭찬하더니

 

막상 임금 한다니깐 인정 안해주는거야

 

 

명나라에서 전화를때린다

 

- 아 바라  여기 명인데  너거 와  장자인 임해군 을 임금 안하고  광해군이 하노.  광해군이 하먼 우리는 허락 못한데이

 

- 아이고 어른나라님  우리가 의논했는데요  임해군은 인물로 못되서 광해군 할라고 합니더

 

- 임해군이 와 어떤데..?

 

- 마 별로 입니더     미쳤심더

 

- 그래....  그라머   우리가 가서 임해군   하고 광해군 하고  둘다 만나보고 결정해주게..    알았나  그리 알거라

 

 

그래서 명에서  사신이 티탄 후레임에 풀 엑스티알 구동게 달린 가벼운 하드텔 잔차타고  열나게 달려온다. ( 하지만  짜가중국산이다 )

 

  먼져 광해군을만나 보고  임해군을 만날려고 하는데........

 

임해군이 당시 멋하고 있었냐하면   하도 개 지랄하고 다니고 상놈하고 싸움이나 하고  동네 술먹고 행패부리고  하다가

 

어느넘이 잡아다가 왜놈한데 팔아버린다.(만주피난시절에)              왜놈장수가  임해군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버리니  난감.....

 

이때 임해군이  머리를 쓰는데   왜놈 장수보고  

 

- 바라  왜놈아  니    날 놔주면  내가 돌아가서 조선의 왕이 되갓고  한강 이남 땅 다 니줄게 내 풀어두가.

 

- 정말이가..?

 

- 진짜가..?

 

-  그래 진짜다  나는 평생 거짓말 못하고 지냈다 아이가..

 

- 그라머  내    니 풀어줄게    대신   니  아들하고 딸하고는 여기 놔두고  가거라.

 

- 알았따..

 

임해군은 자식을놔두고 지혼자만 후지자장구하나타고 돌아온다( 후지후레임 별로 안좋타던데)..  

 

후일에     아들은 이름있는 중이 되고     딸은 어느장수집  하녀로 살다가 커서는 그장수의 성노에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풀려난 임해군은  자식생각과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더  난폭해지고 결국 강화도에 귀향 가있는상태..

 

명나라 사신이  강화도로 찾아온다.   

 

 한데    기이한일은 사신을 만난 임해군은 정말  미친척 생쇼를다하여  사신을 멍하게하는데

 

명 사신앞에서    광해군이 내 임금 자릴 뺏었다고  한마디만 하면   지가 왕이 될수  있을 찬스인데도    포기 하였다.

 

왜 일까....??    나는 여기서  여러 정황을 보아 첨부터 임해군이  포악한 사람은 아니였다고 본다.

 

태여나서 엄마얼굴도 못보고 자랐으며  무능한 선조 인 아버지 사랑 또한 한껏 받지 못하면서  왕이 되어야한다는중압감에

 

시달리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암튼 이넘도  연구 해볼만한  인물....   담에 논하기로 하고


 

 

임해군의 광기 를 본 명사신  - 

 

- 그래 임해군은안되겠다  광해군     니      왕  했뿌라  허락할게

 

이로서 조선 제 15 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의 나이 34 세다                        비록          15 년 까지하고 쫒겨나지만....

 

왕이된 광해.....할일이 태산 같다   붕신같이 무능한 아부지 선조가 저질러놓은 왼갓 일들을 수습하여야한다.

 

 

열거하면

 

-임진왜란의 경험을 통하여 전쟁이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와 밑바닥 민심을 몸소체험한 광해는 개혁을 단행한다.

 

 대동법(특산물대신 쌀로세금내는일 )을 공표하여  민생을 살피고  대 외적으로는 실리를챙기는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친것이다

 

 

돈만 있으면  대신 군복무를하니 양반들은 다빠지고 힘없는 서민들만 군에가서 적과싸우니  이길택이있나-

 

돈있으면 부역도 안해  소작민한데 세금 10 거두고 나라에는 5 만내면되니  결국 서민만 세금내는세상

 

요딴것들을 대동법으로 바로 잡는다.

 

 

양전사업과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국가재정 수입을 늘리고

 

폐허가되어버린 창덕궁,창경궁도 다시짓고 (요기까진걸타치고 인덕궁과 경희궁을 짓느라 무리를한다 )

 

신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 전쟁으로 없어진 서적을 간행하고

 

역대 왕들의 실록이 불타던것도 무주적상산성에 사고를설치하여 중요한 전적등을 보관했다.

 

 또 이시대에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이 나와 문학과 의학부분에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중..... 명나라와 후금이  둘이 치고박고 싸움을한다.( 후금이 먼져 시비를걸어  궁뎅이를 찼다 )

  

명은 지는해이고     오랑케가 근본인 후금은 떠오르는 나라-

 

 

명 황제가 광해한데 전화를 걸어온다

 

- 바라  나 명  황제인데     니 광해 맞나..?

 

-  네  왕님 광해 맞는데요   무신 일인데요..?

 

-  아   다린게 아니고  오랑케 가 어제 우리 나라를  쳐 들어왓다 아이가  겅게   너거군대 좀 보내두가  같이싸우게

 

- 안됩니다  마 우리도  왜놈들한데 맞아가지고 아파서 죽겠는데  못갑니더

 

- 시끄럽다  빨리 보내라  안보내면  너희 나라 삭 밀어뿐다.

 

 

명을 도우자니  후금이 무섭고   안도우자니  나라가 위태롭고

 

나라대신들도 양갈래로 나누어 말싸움만 한다      보내자        안된다..   명에 신하된 도리를 다하여야한다는  골빈 대신들 땜에

 

광해 11년

 

 

명의 압력과 골빈대신들 에 떠 밀려  조선군 1 만명을  강홍립을 대장으로 보낸다.

 

여기서 우리 광해군의 천재머리가 발동 하는데.......강홍립이 누군가 장수 ? 아이다 강홍립은 전공이 외교관이다 외교관을 장군으로?

 

 

전날 아무도 모르게 강장군을 처소로 불러들인 광해군은

 

- 보소 강장군  내말 잘 들으소  명나라 대신 후금과 싸우다가   열심히 싸우는척 하다가  우리 군사 들 피해가 올때쯤

 

   마   백기 들고 항복하고 후금으로 가소.   가서  일게 말하소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는데 할수 없이  왔다고..   알았지요..

 

실제로 강장군은 투항을 하고 후금에게 부득히  출병하였다  고 하니

 

명나라는 대신 싸워주었기 때문에 명분을 세웠고    후금은  싸우지 않고 투항을 했으므로 고맙고   조선군사들은 피해를줄였다

 

또 투항한 강장군은 몰래 몰래  후금의 상황을 비밀리에 광해군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 울메나 실리적인  외교적 전술이던가

 

이렇게 머리를쓰고 있는데  골빈 대신들은  강홍립을 역적이라며 죽이고 그 가족들을  처형하라고 지랄을떤다

 

명에 대한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면서 뭉쳐서 광해군을 괘롭히고 들 뽂으나....

 

광해군은 오직 나라를 생각하며  개혁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해군의 개혁정책은  양반관료들의 반대로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데

 

정통성과 지지기반이 약했던 왕이므로 실권을 행사 할수 없었더것이다.

 

 

일일이 열거 를 다할수 없을정도로 광해군은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하지만

현실은......  역사는  광해군을 외면 하는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될때  명나라와 같이 장자인 임해군 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몇명 무리가 있었다

 

이 무리들이  가끔씩 임해군을 들먹이자  이이첨 등이 임해군 을 없에라고 진언을 하는데     오이려 광해군은  진도에 유배 되 있던 임해군을

 

가까운 강화도로 불러들인다.   그리곤 어느날 전화를하는데

 

- 진  행님  잘있는교  건강하지요.....?     나 동생 혼이요..

 

- 구래 혼이가

 

- 잘있다   건데   건강은 안좋다   매일 술로  살다부이  건강 안좋다   어제 도 4 시까지 빨았다   아고 속이 안좋네

 

- 술 구만 좀 드소 행님     내일 내가  행님 한데 보약 보내줄게요  드시고 건강 챙기소   그라먼  내가  궁으로 오게 할게요

 

 그래..?  정말이가   거라먼 보약보내두가   내 묵고 건강해서 궁으로 가고 싶다.

 

- 알 심더

 

 

이튿날  강화도 진 행님 앞으로 보약을 보내라고 명하니

 

이일을 알고 난  이이첨  --  평소 임해군을 생각하는부리들을 경계하던차    일을 꾸민다.

 

 

쌀집자전거 뒤자리에 보약 잔뜩 싫고 가는 넘을  협박 해서   보약대신  사약 한자리 를  봇짐에 지우면서 사이클 로 바꾸어 잽사게 보낸다.

 

 한양간다고 그 좋아하던 술끊고 거금들여 올마운틴 하나 부랴부랴 꾸며서   새벽 일찍  성을 들머리로 하여

 

고려산과 혈구산을 업힐과 다운을 한바리하고  집으로 오니  동생이보낸 보약이 도착 했단다.

 

 

보약인줄 알고  먹고 건강챙겨서 궁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임해군은    사약 한사발 먹고  쓰러지는데.............

 

파란 강화도 하늘을 쳐다보면서  동생 혼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입에는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머리에는  왕의 자격으로 태여나

 

왕이 되지못하고 살아온 한많은 세월과  일본에 두고온 아들딸을 그리면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 몇일전에 꾸며놓은 올마 잔차를 바셀에올려 팔지도 못하고 )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1613년  광해군 5년

 

문경 조령에서 하나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른바  7 서지옥이다

살인 사건이 부풀려저 역모사건이되고  주모자들을 잡으니  모두가 명문가 서자들로서   관직에 나갈수 없음을 한탄하며

이러한 사회적 부조리에 불만을 가지고 일을 저질렀던것이다

 

그러나  이사건을 가지고 자기들 이익에 이용하는집단이 있으니   바로 대북파 이이첨 김게 정항등이다.

임해대군이 없어진 지금 젤 걸림돌이 바로 영창대군 이 아닌가

사건을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 할려고 했었다는 역모로 몰고 간다.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사약을받고 ....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 정협 신흠 박동량 한준겸 유영경 등은  정계에서 은퇴 하고

실권을 잡은 떼거리 대북파  들의 말을 듣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귀양보낸다.

 

하지만 귀향 보낸 어린 영창대군의 존재가 있으니  걸리적 거린다고 대북파 들은 시도 때도없이 죽이라고 고한다.

그때마다 광해군은

그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역모를꾸미겠는가   안된다     절데로 그렇게는못한다하고 버틴다.

광해군이 끝까지 버티면서 말을듣지않자 대북파들은 직접나서      이이첨이 강화부사 정항에 게 전화를건다.

 

- 여보세요... 그누구고  강화부사 정항이가  내 이첨이다.

- 넵 강화부사 정항 입니다.

- 그래  강화부사구나  정항 이 니 내 말 잘 듣거라   강화도면 거기 촌이지..?

- 네 여긴 촌입니다

- 그래 니 내말 잘 들으면  한양으로 진급 시켜서 올리줄게

- 네-  분부만 내려 주십시요  무슨일이든 다 하겟습니다   무슨일 입니까?

- 거기 영창대군 있제

- 네 여기 있습니다

- 그래  니 그 영창대군을 니가 알아서 지깁뿌라   그리고 내한데 전화 해라   알았나..?

- 네  아랐습니다.

 

당쟁과 한양으로 진급시켜준다는 꼬드킴과 거절할수도없는 상황 

강화부사 정황 그 무식한 넘은   7  살 먹은 어린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넣고 불을때어 죽인다.

 

 

광해군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 강화부사 정항 이 고을에 도착하여 위리안치 주변에 사람을 엄중히 금하고   음식물을 넣어주지않고

 

침상에 불을때어서 눕지못하게 하였다"

 

" 의( 영창대군) 가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 낮으로 울부짓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

( 사실 이 일기도 인조반정후에 광해군을 격하하기위해 적은것으로 실제론 영창이 그냥 기력이 다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

 

이 사건이 바로  " 계축화옥" 이다

 

 

 

이 계축화옥 으로 확실히 실권을  잡은 대북파들은  여세를모아  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걸리적 거림을 모두 제거 하려는 모의를하고

 

 영창대군 어머니  인목대비 를 페모 하라고 들수신다.

 

광해군은 완강히 거부하며 버티는데      오래 버티지를못한다

 

 

1618 년  결국 인목대비를 페위하여 서궁에 유페를한다.    거러자  대북 파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 왼갓 비리를저지르며 왕권까지 건들리고

 

광해군은 혼자서 개혁의 고삐를 죄나 따라올넘 한넘도 없다    민심이 숭숭할때즘

 

역모의 정보가 들어온다   거러나   역모의 움직임을 고발하는 한 통의 상소를받은 광해군,   그는 어떤 조치를취하였을까..

 

광해군 일기에는 " 대수롭지 않은일로 여겼다 " 고 전한다

 

 

여기서 대수롭지 않게끔 만들게 하는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여인  이름은 상궁  김 개시 였다.

 

상궁 김 개시  그녀는누구인가?   김개시  풀어내면 끼일개(介), 똥시 (屎)   김 개똥이다

 

"궁궐안의 모든 일들이 김개시 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연려실기술에는 전한다

 

 

 김개똥  -  김개시 --- 김상궁

 

그녀는 천민의 딸로 나인으로 입궐하여 광해군을 보필했다.

실록에 의하면 나이도 많고 얼굴도 출중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천민출신에  얼굴도 이쁘지도 않은 그녀가 무슨이유로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 잡고   광해군이 즉위한 15 년동안 최측근으로 활약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을까

개똥이 한데 돈만 주면 벼슬은 물론 안되는일이 없었다 하니 참으로 통탄할일이다

왕위를계승하는데 대북파가 도을때 김개시 조금 도왔는데  그일로  그만큼 권력을 줄까....

 

여기에서 김개시 를조금 들여다보면

 

김개시 개똥이는 당시 천민으로서 어릴적 명을 길게 하라고 개똥이라고 지었다  이름이 지저분하면 오래 산다나...

천민이기에 궁궐로 들어와 나인으로 일하다   어쩌다 술취한 선조의 눈에 띄여 성은을 입는데

비가 되어야 하지만 얼굴이나 신분이 비가 될 깜정은 못되어  그냥 신분이 격상되어 상궁으로 진급하게되고

거처는 광해군 주변이라..   

 

광해군이 어릴적 엄매를 잃고 모성이 그리울때에  개시가 옆에서 누나겸 엄마노릇을 했었던관게로

후일 왕위를 오르는데도 일조를하고  궁궐의 내막과 나이많은 정치인들사이에 끼여 통밥이 빠삭하니

수시로 광해에게 조언을 한다.   정치가 별건가 ... 배운건 없어도  눈으로 보고 들은게  있지 않은가

해서 대북파를도우고 왕을 도우면서 하다보이  점점 실권이 강해져서 권력을 사고 팔고 물욕에 어두어져 국권을 흐트리게까지한다

 

암튼 인조반정 의 조짐이 처음 있을때  여기 개똥이가  인조반정의 주력인물인  김자점에게 뇌물을받고

배신을 하면서  광해의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고 전해 온다

 

역모가 있다는 상소가 몇번이나 올라오지만  이미 김자점과 결탁한 개시가 중간에서  아무일아니라고 광해의 판단을 흐리게하여

상소는 올라오는쪽쪽 쓰레기통으로들어가버리고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는데

반정후 안위를 보장받고자 자점이 한데 누누이 다짐을 받았지만   정치란 무엇인가--- 오늘의 아군이 내일에 적이 되는게 정치가 아니던가

반정의 회오리에 끽소리한번 못하고 참수 당하니    개똥이의 신세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똥똥똥똥통속으로.....

명분이뭐냐하면  배신자는 또 배신할소지가 많다..ㅋㅋㅋ   말되네..

 

 

 

임금 반상머리에 궁디데고 앉아 있는  버릇없는 넘

 

인조반정

 

광해군 15 년  1623년 3 월 12 일

 

서인출신 무인과 문신들이 1400 여병력을 동원 반란을 일으켰다

홍제원에서 집결하여    창의문을 통과하여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돈화문

돈화문에는 누가 있나   바로 조선의 최고 병사  훈련도감 이 지키고 있다

훈련도감의 최고 사령관인  이흥립  이 지키고 있었으니  이흥립이 배신을 하고  거사에 합유  바로 문을 열어줘버린다

 

돈화문이 접수되자 바로 창경궁으로 진입하니     멍하니 있던 광해군은 내시 의 등에 업혀 월담을 하여  담벼락에 버려진

생활자전거 중국산 짜가를타고 도망을 치고

 

궁을 접수한  서인은 대북파 주동 40 명을 참수 하고  200 명을 숙청한다

 

평소에 잔차를좀타고 허벅자 근육이나 좀 불려놧으면 몰라도 궁안에서 정사만 돌보던 광해군은  중국산 생활잔차를타고 도망은 갔으나

십리도 못가서 붙잡혀온다.

그리곤  덕수궁 석어장 인목대비 앞으로 끌려와 무릅을 꿇는데   조금전 까지만 해도 천하를호령하던 왕이 아니던가

 

" 광해는 천리를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의 죄를짓고  아래로는 만 백성에게  원한을 맺게 하였다

 이에 너를 폐위 시키노라 "      ---1623 . 3 14   인종실록----

 

첫째---동생을해치고 어머니를 폐했다는 것

둘째---가렴주구로 백성을 고통에 빠트렸다는 것

셋째--- 오랑캐(후금) 에게 정성을 다 했다는 것

외에

 

인목대비는 36 가지 의 죄를 물어 참수 할려고 하나  서인들의 간청으로 목숨만은 살리고

왕에서 군으로 강등하고( 대군===임금의 적자. 임금의형제       군== 임금의 서자,대군의적장자,세자의중손,  폐위된 임금)

강화도로 귀향을 가며

성공한 반란군에 의하여 광해군 일기를 수없이 띁어 고쳐

역사에 패륜아 이며 폭군으로 기록하고  인조는 혁명군주로 기록을 하여   인조반정 을 미화시킨다

 

원래 역사란 성공한 무리로만 존재 하는것

 

백성을 위한 정치를하고 싶었던 머리좋은 광해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해법을못찾고  결국 쫓겨나  후세 씻지못할  군으로 만 남겨되는 광해군   

광해군을 보노라면     과연  왕의 조건은 무엇이며    왕의 할일이무엇이며  백성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하는데.

 

 광해군 묘역의 무인석  일반적인 왕릉의 무인석보다  크기가 작으며 조각상태가 매우 단조롭다

 

 

강화도로 유배된지 1년도  안되어 아들은 탈출할려고 몇달를 개고생하여 땅굴를파서리 튀어나온게 측량을 잘못해 경비초소에


 튀어나왔다나  머랬나..ㅎㅎ    


며느리는 자살하였고   아들은 사사 되였으며


광해군의 부인은 홧병으로 죽습니다.

 

 

강화도에서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 광해군 온갓 수모를 다 당하는데    감시자 이자 관리자가  안채를 빼앗아 사랑채에다 광해군을 기거시키고

 

심지어 제주 현감은 대놓고 광해군 보고 영감님 이라고 까지 부릅니다.   일국의 왕인데 영감이라니.  이런..

 

 

그러나 광해군은 모든것들을 감수하며 초연히 참아내며   18 년간 유배생활 을 하다 1641 년  인조 19 년

 

조선왕중 세번째로 장수를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67 세 ( 젤 오래산 임금은 영조 83 세   태조 74 세   그다음이 광해군 입니다. )

 

 

추측하건데  광해군이 오래산 이유중 하나는  제주도에는 잔차코스가 무지 많습니다. 해서 아마도  중국산 생활잔차를타고  평소 근력도 없이

 

도망가다가 붙잡힌 후로 제대로 된 mtb 하나 구해서 한라산으로 올레길로 열심히 잔차를 타서 장수 하지 않았을까 .......^^

 

 

 

광해군은 눈을 감으며  자신을 어머니 발치에다 묻어 달라고 합니다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 년만에  산후병으로

 

25 세에 요절했습니다.   광해군은 어머니를 기억하지못하지만   죽음앞에서  어머니가 생각 났나봅니다

 

묘지 정면 우측으로  골 건너편 위에 생모 묘가 있습니다.   혈육이란.........................................................................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                단군이래 최대의 국가적 수모를 남긴다.

 

광해군의 실리외교와는달리 명분도 실리도 없는 개떡같은 외교를펴다  

 

2 번이나 열나게 얻어터진다  쌍코피는물론 어금니 3개까지부러지는데    1번은  정묘호란     2 번째는   병자호란

 

 

강화도로 도망 쳤다가          다시 남한산성으로 피신....

 

끝내는  송파구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서  3 번 절하고  9 번 굽신거리는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굴욕을 당하고

 

청나라라로 돌아가는 승자의  짐잔차에 사람이 보이질 않을정도로   노획물을 가져간다

 

온갓 보물과  노비 그리고 조선의 이쁜처녀들만 골라  내어주니     짐잔차 인들 벼텨 내겠는가  ( 짜가중국산인데)

 

 

북으로 북으로 가다가 무게를  버텨내지를못하고 빵구가 나고 부서지고 하는데   그때  일부 조선 처자들이 북쪽에 남개 되므로

 

남남 북녀라고  남쪽에는 이쁜처지들이 씨가말라  현존에는 서울강남에 성형외과가 성행하고 있는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서글퍼고  고달픈 역사를 뒤돌아보는중....    마지막 숨을 거두며 얼굴도 모르는 생모를 찾았을 광해군을 생각하면서

 

생모인 공빈김씨 묘를 향하여 힘껏 패달질 하며 다운 으로 슁~~~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 유배중 제주에서 쓴 광해군 글 ----

 

 

 

 

 

광해군 묘에서 죽 내려오면  영락교회 공원묘지 정문이 나옵니다

 

정문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들어가면   안쪽 좌측으로 언덕에  임해군 묘가 있고   

 

다시 내려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더 올라가면  우측 능선에   광해군 , 임해군 의 생모인  공빈 김씨 묘가 있습니다

 

가바야하는데          헌....디                시간이 없어    오늘은 여기를 패스하고 바로 사릉으로 향함다.

 

 

사릉 정문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40 곳의 왕릉 중 아직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곳이 몇몇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러한 미공개 능들을 재정비하여 지속적으로 개방할 계획이며,

그 중 201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임시로 개방하는 세 곳의 능을 발표했습니다.

 구리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 서울 노원 삼육대학교 정문 왼쪽에 있는 강릉, 남양주 진건읍에 있는 사릉이 바로 이곳입니다.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능이다.  

    

 4 개의 릉이 아니고  思陵  이다           평생을 남편 생각하다  는 뜻이겠지

정순왕후는 조선 왕조 500년의 수많은 왕후와 후궁들 중 한이 가장 많은

여인으로 여산 송씨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 정월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면서 의덕대비(懿德大妃)로 봉해졌다

.

1456년 6월 상왕복위사건이 일어나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하고, 이듬해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왕후도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생부(生父)는 역모죄로 지방관노(地方官奴)로 영속되었다.

 

이후 왕후는 궁궐에서 나와 영월의 단종이 묻힌 장릉을 바라보기를 소원하여 동대문 밖(현 숭인동)에 작은 초실(草室)을 마련하여 거처하면서

소복과 소찬, 궁의 도움없이 삵바느질로 생게를 구리며  평생을 마쳤다.

 

 

 

사릉의 소나무는 60 년대 이곳을 관리해온 것이라한다

 

 

1521년(중종 16)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중종(中宗)이 군부인(君夫人)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왕후는 후사가 없고, 친정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을 뿐만 아니라 가산도 적몰되었기 때문에 묘자리가 없었다.

이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자신의 아들인 정미수(鄭眉壽)에게 시양(侍養)하게 하여 해주정씨 선산에 안장하였으며 위패도 정씨가에서 모시게 되었다.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고 숙종이 향사를 행하였다.

 

 

 

사릉은 군부인의 예로 조성되어 난간석과 무인석이 생략되었으며 복위 후

왕릉으로 승격되면서 모든 석물들을 능제에 따라 다시 조성해야 하나,

당시 가뭄과 기근으로 일부만을 이전대로 증수하여 석양과 석호 1쌍을 추가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능을 수호하는 호석과 양석은 2쌍을 배치하는 것이 예인데 장릉과 같이 추봉된 경우에는 각 1기만 배치하여 두어 차등을 두었다.

 

 

배위 === 여기서 임금이 4 번 절을 하고  어도 로 나아간다

 

신도=== 신이 지나는길

어도=== 임금이 지나는길

예감=== 제사를 지내고 난 축문을 태워 재를 넣는곳

 

정자각 다가서 끊어진 참도

다른 왕늘의 참도 와 다른점 은 짧고 끊어졌다는점  왜 일까...?

 

 

좌측 계단이  신이 올라가는 신계

우측이 임금이 올라가는 어계

 

능침

 

정순왕후 능은 한 분만 모신 단릉으로, 주변에 석물도 거의 없고 아주 단촐합니다.

단종은 저 멀리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잠들어 있습니다.

 

 

 

 

 

 

 

 사릉 주변에는 상당히 특이한게 개인의 묘소가 꽤 많이 (얼추 5기 이상)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이 해주 정씨의 선산이라서 무덤 역시 해주 정씨 가족들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순왕후 송씨가 사망하였을 때 그녀가 묻힌 이 곳에는 이미 해주 정씨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고한다.

 

 정순왕후의 남편인 단종에게는 유일한 가족이 누나인 경혜공주가 있었는데,

 경혜공주가 해주 정씨인 정종(참고로 정종은 단종의 거의 유일한 벗이었고,

 

세조 즉위 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과 혼인을 한 것이 인연이 되었고,

 정순왕후가 사망한 이후에 정종의 아들이자 정순왕후의 시양자인 정미수,

그리고 정미수의 양자인 정승휴(정종에게는 손자가 된다.)가 정순왕후를 그들 가문의 선산인 이 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주 정씨에서 이 정순왕후의 묘까지 관리해 주었다고 한다.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180여년이 지난 1690년대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에 이르러서 이 곳이 사릉으로 격상되면서,

 원래는 해주 정씨의 묘소는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하지만,

 

그동안 정순왕후를 기린 해주 정씨를 가상히 여긴 숙종 임금이 해주 정씨들의 묘소를 이장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묘지이장은 안하고 대신 비석들만 땅에 묻었고  

그러한 연유로 이 사릉 주변에는 해주 정씨의 묘소가 다수 자리를 잡고 있다.

 

 

야생화 전시장

 

 

 

 

 

문재산 싱글코스

 

코스를정리하자면 

왕숙천--견성암 업힐을하고--광해군묘--광해군생모 묘--임해군묘--사릉--사릉앞 프로하스 현대미술관 관람

문재산 싱글코스 라이딩--왕숙천

이렇게 하면 한 코스가 되지 않을까...

 

 

 

 

 


 

문재산후기1.gpx

 

 

 

문재산후기2.gpx

 

 

 

 

 






남양주-광해군.사릉66.gpx
0.22MB
문재산후기1.gpx
0.06MB
사릉8.gpx
0.22MB
문재산후기2.gpx
0.1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