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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5-----남양주------------사릉,성묘(成墓),임해군(臨海君),백봉95

단석 2013. 8. 26. 00:03

 


 

남양주-성묘,임해군.백봉95.gpx






지난번(2013/5/5일)  광해군묘를 찾은후 바로 어머니 인 성묘와 형 임해군 묘를 찾을려고 했으나 시간부족으로 지나쳤다가  오늘에야 찾는다.

한풀 꺽였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는 푹푹 찌는데  한바꾸 빙 둘러서  왔다...

 

 

 

 

점심은 여기서    송릉리 마을 에 있다

 

영락교회 공원묘지   우측으로       좌측 황색선은 일 전에 들러본 광해군묘 가는길

  

1-- 마을회관 앞에서 우측으로  표시석 보고 들어감

 

2-- 막다른길   좌측도 집  우측도 집

     골목길을 따라올라가니 막다른 길이다   아닌가 하여  도로 내려오다  학생을 만나 묻는다.   막다른 곳에서 우측 개있는집으로 들어가랜다

       남의집 마당으로 잔차를끌고 염치없이 들어가는데...

 

남의집 마당이다  마당에서 도 자세히보면 삼거리인데  좌측으로   사람하나 겨우 지나칠정도의 길로 들어선다

집 안방이 훤히 보인다   세상에 이런곳으로 지나가라니..

 

 

3--직진성  좌로 싱글길로 간다     좌로 황색선 으로 가면 풍양조씨시조묘 인 조맹의 묘로 지나쳐 성묘로 갈수도 있다

     .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 안동김씨와 함께 세도정치를 펼쳤던 외척중의 하나인데(23대 순조의 아들이자 24대 헌종憲宗 의 아버지가 추존왕 문조文祖 ,

         즉     효 명세자인데 효명세자의 부인이 신정왕후 조씨이다.)

 

조씨 묘와 성묘  사이에서 바라본다    -----------  바로 이 자리가 조선 8 대 명당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진건읍 송릉리 산 55 번지

 

공빈 김씨 아버지 김희철은 의병장으로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중 전사--후일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해령부원군 으로 추증함

 

 

 

 

 

 

 

조선 제14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의 묘이다. 공빈 김씨는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재색이 출중하여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선조를 즉위시킨 명종의 후비 인순왕후 심씨 는 명종의 3 년 상 중이라 왕비를 둘수없으니 동안 후궁이 들여 자손이라도 낳으면 서열문제로

골치 아파지니 여자를 조심하라고 선조에게 당부에 당부를한다.

허나 원래 졸지에 왕이된 선조, 심지도 굳지 못했다.  쪼다 반죽 같은넘  주위에 후궁으로 들어설려고 왠갓 추파가 설치는데,

 

 

       와 중에 공빈 김씨는 왕비 의인 황후보다  먼져 부인이 되었으나   3년 상중이고

       인순왕후의 당부와   서자의 컴플랙스를 갓고 있던 선조 때문에 황후가 되지못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선조의 원후가 된  의인황후는 선조 사이에 자식이 없으니

 

      1575 년 1 월  대비 심시가 죽자   선조의 총애로 명실상부 안방의 댓빵이 되지만-

 

  공빈김씨 또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이 세살 되던 해 산후병으로 25 세의 젊은나이로 사망.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능은 성릉(成陵)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다시 성묘(成墓)로 바뀌었다.
 
 

 

 

 

 

묘역은 작은 능선에 안치되어 있어 세밀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었는데 곡장 안으로 서향한 봉분에는 8개의 사대석을 둘렀고, 그 주위에 12개의 기둥으로 된 난간석을 돌렸다.

 
  특히 난간석을 그 중간에 문양을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 하였다. 봉분 주위 양쪽으로 호석과 양석을 각각 2개씩 놓았으며 봉분 앞에는 거대한 상석을 배치하였고 좌우의 망주석은 팔각의 받침대에 이중으로 층을 만들었다.
상석 앞에는 장대석을 놓아 층을 만들고 그 밑에 문인석, 말석, 장명등을 배치하였으며,
 다시 그 아래 장대석으로 층을 만들어 무인석과 말석을 배치하였다.

 

 

자전거를 마땅히 둘곳이 없어  무인석 옆  말석 앞에다 기대어놓고  이리 저리 둘러보는데

스피커로  " 죄송하지만 자전차 를 석물에 기대지 말아주셔요 "

허걱------------- 아차 하고   바로 뛰어가  잔차를 저 만치 떼어놓으니   " 감사합니다 "  라고 방송이 나온다

둘러보니 스피커도 있고  카메라가 대충  8 대나 설치되있는데....  관리는 잘하고 있는듯

 

문인석

 

 

 

공빈 김씨가 묻혀 있는 성묘成墓 는 전경과 위성사진에서 보이듯이 묘墓 가 아니라 능陵 에 어울릴만한 곡장과 꽤 많은 석물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그녀의 사후에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을 왕후로 추숭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광해군은 왕위 재위기간 내내 어머니를 높이는데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광해군 2년에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 로 추존하고 그녀가 묻힌 곳을 성릉成陵 으로 격상한 것을 비롯해,

광해군 7년에는 명나라에서 고명을 받아오고 종묘에 부묘하였다.

 

광해군이 그녀의 어머니를 왕후와 왕릉의 위상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래도 광해군이 정실 태생이 아닌 후궁 태생라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가장 크다고 보이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선조가 가졌던 정통성 컴플렉스랑도 상당히 비슷해서 흥미롭다.

 조선 역사상 정비가 아닌 후궁을 왕후의 위치로 잠시라도 격상했던 것은 광해군이 유일무이하다.

 

(연산군 역시 재위기간동안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격상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나마 폐비 윤씨는 정식 왕비의 위치에 있기는 했었다. 나중에 폐비되기는 했었어도)

 

무인석  과 말석      두눈을 부라리고 있고  수염을 죽죽 그은듯 투박 하게표현한것 갓지만  위엄이 넘친다.

 

문인석  밑에  무인석   문무 의 서열

 

.중앙  혼유석         좌측  장명등


 

능 치고는 봉분이 비교적 작은느낌이다   자리도 작게 차지하였고   하기사 더 넓게 하려고 해도  여유의 자리가 없다.(넓힐수없는곳 선정 )

좌 우  곡장 주변은 사람하나 겨우 지나갈수있는  바로 경사가 심하기때문이다

선조가....     자기 자식 둘이나 낳은  여자를  비록 첩이지만              홀대 하였나...?

 

석물로보아  능으로 갖출것은 갖추었다하나  초라하다

 

잡신과 재앙을 막아준다는     우측 4기의         석호(石虎  )와   석양(石羊)

 

좌측 4기의  석호(石虎  )와   석양(石羊)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인조  

 

인조는 인조 8 년에  여기 성릉을 성묘로 격하하고  능으로서 갖추어진 석물들을 모두 치우라고 명하였는데

 

이상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조선 선조나 광해군 시대는 예법이 무지 까다로왔다  서자 적자 양반 상놈 등으로   또한 묘지 법또한  상당한 기세라

 

왕능 주변에는 일반 묘가 들어설수 없다  만약에 일반 묘가 먼져 들어섰다 하더라도 능이 들어서면 반경 으로 죄다 이장을 해야하는데

 

여기 풍양조씨 시조인 조맹의 묘는 공빈 김씨 성묘가 광해군 2년에 능으로 격상 됬을때또 이장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

 

그  의문을 풀어줄 글귀가 조맹의 비석뒤에 적혀 있다

 

이렇게

조선왕조 중기에 해당하는 선조宣祖 10년 공묘公墓 (풍양조씨 시조인 조맹의 묘)에서 후면으로 30여보 떨어진 지점에 공빈이 입장入葬 하게 되고 광해군 즉위 2년에 그 묘소가 성릉成陵 으로 추숭됨에 따라 공의 묘소가 한 때 평장平葬 (묘의 봉분을 평평하게 깍는 것)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니..." 


즉 이장을 하지않는대신 봉분을 평평하게 깍았다는것인데  그것도 엄청난 해택이다  왜 일까....?

 

선조 10년(1577) 공빈김씨가 죽자 그의 묘를 풍양조씨 시조인 시중공 묘소 뒤 30보쯤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 당시의 국법으로는 왕실에서 능묘(陵墓)를 쓰게 되면 그 구역 내에 있는 사가(私家)의 묘는 이장하여야만 되었다. 따라서 공빈 묘소가 입장함에 따라 조맹의 묘소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선조대왕께서 "그분으로 말하면 과인이나 공빈에게도 외조(外祖)가 되는 터이니 이장은 하지 말라"는 왕명으로 간신히 수난을 면하였다.

 

광해군의 배려도 이었기에 오늘날에 조맹의 묘가 여기에 있다   

배려란..

공빈김씨의 묘소가 성릉으로 격상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맹 묘소의 이장문제가 대두하게 되었으며 이장은 불가피하게 되여 조정에서는 군신 간에 여러 차례 논의가 되었으며 자손들은 이장문제에 따른 비용 염출을 위해 친손만으로는 부족해 외손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내고 이장 예정지까지 정하였던 상황에서 당시 영의정 이덕형의 의견과 영중추부사 윤승훈, 완평부원군 이원익, 청평부원군 한응인등 여러 신료들과 지관들의 증언으로 광해군은 왕명으로 이장만은 면하되 다만 봉분을 평치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산을 꾸며 치산토록하게 되었으니 자손들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상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볼때 같은 용맥에 10 m 사이로 자리한 두묘

광해군이 67 세로 장수는했었다하나 왕 자리를 빼겼는반면  풍양조씨는 조선 의 최대 명문가로 명성을 떨쳐는데

과연 풍수가 맞는건지...

 

평평하게 깍아진 조맹의 봉분은  인조반정으로 왕이된 인조가  반정의 명분을 위하여

인조 1년(1623년)  3 월 16일   광해군이 어머니 를 위해 중국에 고명까지 받아   공성왕후 로 받고  성릉으로 격상 한것을

성묘로 격하 하고 공빈으로 격하하였으며   고명과 면복은 불태워 버린다.

 

것도 모자라  인조 8 년 (1530년)   성묘 앞 조맹의 봉분을 다시 세우라 하고  성묘 주변 석물을 없에라고 명하였기에

현재에 이런 상황이 된것이다 .    당시에 광해군이 당시 매몰차게 조맹의 묘를 법대로 이전했더라면  아마도 지금 처럼은 되지 않았으리라 ...

 

 

 

원래대로 광해군이 만약에 왕위에서 폐위되지 않고 종宗이나 조祖 로 끝나는 정상적인 왕으로 역사속에 남았다면, 공빈 김씨의 묘소는 최소한 능陵 의 칭호는 받지 못했더라도 왕의 생모라는 점 때문에 원院 의 칭호는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이 결국에는 정식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역사로 인해서 그녀가 묻힌 곳도 원院 이 아닌 묘墓 라는 가장 격이 떨어지는 칭호를 받고야 말았다. 이러한 사례는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연산군 재위 때는 회릉懷陵 으로 불리다가 연산군이 폐위된 후에는 회묘懷墓 로 격하된 사례와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아마도 예감이 아닐까 싶다    예감 = 제례후 축문을 태우는곳

 

 

웅장하면서도 세말하며 간명하면서도 예술의 극가치를 보여주는 조선 중기의 석물   무인석 뒷쪽이다

 

성묘를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잠시 생각한다.  왕을 낳았으면서 왕후도 못되고    왕이 된 자식도 못보면서  25 살에 요절한  여인

만약에  광해군이  왕이 되었을때 살아 있었다면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죽어서    저위에는 임해군    아래는 광해군   둘의 아들 곁에서 묻혀있는 공빈 김씨.   아들 둘다 비운의 운명을 지닌체  평탄한 삶을 살지못하였으니......

인생 무상 이로고

 

 

개 짓는소리를 뒤로 하면서  삼거리로 다시 내려와   좌측 위로    임해군 묘를 찾아간다

 

8 월의 마지막 땡볕을 등지고 몇번의 패달질담에 여기로,   까딱하면 못보고 지나칠번    시냇가 농장이란 음식점 정문 좌측에 표시석이 서있다

오르막  잔차의 기어를 바꾸고 천천히 올라간다.   식당 뒷뜰 개집에서  똥개가 짓고..  짓거나 말거나  난 갈길을 갈뿐이고..       무시

 

식당앞 표시석

 

현대식 창고를 두개인가 를 지나고 보니  떡하니  길 우측에 표시석이 조그만하게 서있다

화살표는 우측으로......?  워디로 가라는 말인가    길도 없는데

 

좀전 성묘도 거렇고 임해군묘도 마찬가지     참내 - 둘다 정상적인 길이 없구나.

여기도 남의 창고 옆으로 진입을 하여야 하니..

 

창고와 창고 사이로 들어가니   위로 희미하게 길이보인다

 

몇걸음으로 잔차를 들고 들어서니 삼거리 ,  우측으로 길이 좀더 선명하다 .   하지만   좌측 능선을 따라가야 한다

우측으로 가도  능선을 만나 위로 치고 가면 갈수도 있지만 좀 우회 하는길이다

 

선조의 서자 중 장자  좀전에 둘러본 성묘  공빈김씨의 첫째 아들   이름은 진

 어릴적부터 난폭하여 일찍감시 열외로 제쳐논넘     3살때  엄마를 잃고    1585 년  허명의 딸과 혼례를 올린다.

 

 

참 초라한  무덤 

 

난폭하다하여  세자 자리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중   15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순화군과 함게 김귀연 윤탁연 을 대동하고  함경도로 근왕병을 모집하러 떠난다

하지만   전란 중에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음에도 민가에 약탈을 하고 부녀자 겁탈하고  술이나 쳐마시고 행패를부려대니  어느백성이 좋다 하겠나.

결국  국경인등이 잡아 왜장 가또기요마사 한데 팔아넘긴다.

 

왜넘들이 왕자를 인질로 유리한 협상을  벌리는데   난감한 조정       고원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송

일본으로 까지 끌려간다   여러차례의 협상으로  임해군은 돌아오나     4상된 아들과   6 살된  딸은 인질로 남는데

후일에  아들은 고승이 되고  딸은  왜 장수의 성노예로 살다 생을 마감하엿다고 전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임해군  자식을 두고온 죄책감에서 인지 더욱 난폭해지고   술로 세월을 보냈고, 툭하면 상민을 구타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1608년 선조가 죽자 다시 세자 봉작에 분란이 일어난다    명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고 운을 띄우나  명은  똑똑한 광해군보다는

쪼다같은 임해군이 왕이되야 속국으로 다루기 쉬울터   장자를 구실로 반대를 하면서 임해군을 지명한다.

 

5 얼 5 일날 광해군묘를찾은후기에도 밝혔듯이

 

조선에서 임해군은 미친넘이라서  왕으로 자격미달이라고 전하니

 

명나라 사신이  강화도로 확인하려 찾아온다.   

 

 한데    기이한일은 사신을 만난 임해군은 정말  미친척 생쇼를다하여  사신을 멍하게하는데

 

명 사신앞에서    광해군이 내 임금 자릴 뺏었다고  한마디만 하면   지기가 왕이 될수  있을 찬스인데도    포기 하였다.

 

왜 일까....??    나는 여기서  여러 정황을 보아 첨부터 임해군이  포악한 사람은 아니였다고 본다.

 

태여나서 엄마얼굴도 못보고 자랐으며  무능한 선조 인 아버지 사랑 또한 한껏 받지 못하면서  왕이 되어야한다는중압감에

 

시달리면서 살았으니 정신인들 온전 하겠는가... 

 

 

무인석은 없이  아주 작은 문인석만 세워져 있는데  고것도 모양이 영 아니올시다 이다

대 충 깍아서 세워논듯  얼굴 모양이 저기 머꼬   팔각 장명등 좀 보소   어디 벼려논거 주서와서 세워논듯  좌우 각도 대칭 어느하나 제대로 된것이 없다

 

 비석은 근세에 세워 논듯  생년월일과  죽은날짜  부인 양천 허씨 와 함게..

 

뒤에서 본 묘지  잡초들하며   서열상으로 왕이 됬어야 할 몸이 왕이되지못한 죄로다

 

문제아 사고무친 임해군은 강화도에 유배중    이이첨의 사주를받은  강화현감  이직에 의해 독살 당한다.

 

인조반정 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죄목에 형을 죽인죄 가 추가 되었던 걸로    후세 사람 들은 광해군이 죽인걸로 되어있지만

 

실은 정황으로 볼때 광해는 형을 형으로써 대 하였으나 당쟁의 희생으로 죽었음이 옳타고 본다.

 

 

 

잠실철교

 

비운의 두 사람  임해군과 공빈김씨 묘를 찾아보고 그 흔적을 따라가 본 하루      기 빠진 몸을 끌고 성내천 합수에  도착

지는 노을를 바라본다

 

 

 

 

 

 

 

 보석이

 

아파트 옥상에 걸렸네

 

먼넘의 세상에 미련이 남아

 

반쪽 짤라 강물에 남겼나

 

 

 

 

 

해가

 

진다

.

.

간다

.

.

.

나도

 

너도

 

 

 

 

 

 

남양주-성묘,임해군.백봉95.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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