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5백두산(3박4일)---3일 北坡

단석 2015. 7. 30. 19:51

 

3일차== 북파산문--장백폭포--소천지---녹연담---천지--- 용정 대성중학교---명동촌 윤동주 생가--- 3.13 운동 묘소---연길

 

 

 

북파산문  4곳의 길중 제일먼저 트인곳      입장료 - 125 위안   셔틀버스 - 85 위안  

 

10 인승 미니벤 타러 가는곳

 

천지쪽에 안개가 자욱하다   렬렸는지 닫혓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지를 먼져 볼것이냐  장백폭포를 먼져 볼것이냐

핵심은 천지다  시간을 더 벌어 보자고  우린 장백 폭포를 먼저 택한다

 

 

 

 

 

 

장백 폭포로

 

 

 

 

 

 

 

 

 

 

온천 지역  백두산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장백폭포(비룡폭포,천지연폭포)    폭포길이 68 m

 

 

 

 

 

 

 

 

 

 

 

 

 

 

 

소천지

 

 

 

 

 

 

 

 

 

녹연담

 

 

 

 

 

 

180 대나 되는 10 인승 벤츠  승합차가 천문봉으로  천길 절벽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하면서 도 시속 80 km 로 개미 먹이나르듯 계속 실어나른다

입장료에 보험이 들어있다하나   외국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딴길로 목숨내놓고 갈사람은  보이듯  중국사람과 하국사람 뿐일게다   간큰 나라....

 

 

 

 

 

 

 

 

 

북파주차장 2,200 m   저멀리 천문봉

 

 

 

 

 

안개가 천지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쉽사리 얼굴을 내보이지않는 ...

 

 

 

 

 

 

 

 

 

 

 

 

 

 

 

 

 

 

 

 

 

 

 

 

 

 

 

 

 

 

 

 

 

 

 

 

 

용정 3.13반일 대시위는 서울에서 벌어졌던 3.1반일대시위의 직접적인 영향하에서 일어났다.

  1919년 2월에 조선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용정에 전해졌고 3.13일에 반일대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3만여명의 적수공권 반일시위자들은 독립선언포고문을 선독했다.포고문 첫머리에는 “아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라고 씌어 있었다.

  일제의 피비린 탄압이 있은 뒤 3월 17일 용정촌합성리공동묘지에서 순난자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른 가운데 13명의 열사들을 안장했고 기타 6명의 순난자 유체는 친척이 모셔갔다.이 13개 묘지 중간에 “충열사제공지묘”란 나무비석이 세워지면서 그후의 반일투쟁물결은 연변각지에 파급되어 반일조직들이 육속 일어났던 것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이 발생한지 약 2주 후인 3월 13일 용정에서 한국인들이 2만명 이상 모인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두려워한 일본군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서 독립만세운동은 처참하게 진압되었고, 진압와중에 그들이 쏜 총에 의해 19명의 선열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이 만세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펼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는 후일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 등을 비롯한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모태가 되어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 전개에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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