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665------진접------------광릉,봉선사

단석 2016. 6. 5. 22:45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한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엽산(현재는 죽엽산 ) 자락에 있는 광릉은 제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1418~1483)의 능으로 면적만 무려 249만 4,800제곱미터에 달한다.

풍수가들은 광릉을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한다.

자리가 좋아서 이후 400여 년간 세조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명도 있다.

유일한 동원 이깅형





광릉가는길은  이런길   잔차가  갈길은 없고


좌측에  산책길이 있어  이길로 가다가-----작은 개울위에 어설피 덮어놓은 판자위를 타다가

판자사이에 타야가 끼어 우측 또랑에 꼴꾸닥 ~~~






표를끊고  먼저 문화간에 들른뒤



줄이면-

세조는 제 4대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여나  계유정란으로 권력을 잡고  1455년 조카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왕권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후로 단종을 영월로 귀향보내어 살하고 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귀향보내어 사사하는등    조선왕중에 가장많은 친족을 죽인 왕이며

병약한 문종과  어린단종 시대의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아울러 국방에도 튼튼히하는 정책을 펴는 정치를 하다 1468 년 승하하였다


정희 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세조와 가례를 올리고 왕후가 되었으며   장남 의경세자(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차남예종마저 재위 14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성종)  을 왕위에 올리고  13세 성종을 대신 7년간 수렴청정 하였다. 최초의 수렴청정

계유정난 당시에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



하마비 =  조선왕릉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마비

              하마비는 사원이나 종묘 ,대궐  성현들의 출생지에 세워놓은 석비로서  누구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텀 말이나 가마등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곳이다,  왕조차도 내려야 하는곳



매표소에서 지나고   하마비를  지나  올라갑니다


어린시절-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8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다.

문종이 형이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동생이며, 단종은 조카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고쳐서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다시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졌다.

 세종 말년인 1445년(세종 27)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어렸을 때는 민가에서 자랐는데, 도량이 넓고 활과 말을 좋아했다. 세종은 일찍이 세조의 남다른 기질을 알아보고 아꼈다.

세종은 세자 섭정을 실시하면서 대군들도 정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 결국 이것이 여러 대군들을 비롯한 종친 세력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수양대군은 여전히 정사에 참여했으며, 특히 문종을 도와 《신진법》을 완성하기도 했다.



 

홍살문=신성한 지역을 알리는문   붉은 칠을 한  둥근기둥 2 개를 세우고  그위에는 살을 박아놓았다

           삼지창=하늘, 땅 , 인간       태극문양= 태양, 달, 별



세조가 무술이 뛰어났다는 말은 많이 있지만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아버지 세종은 세조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세조가 일찍이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감탄해 이르기를 진평대군(세조)의 기상으로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 이유의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세종이 또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樂)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왕릉에는 필히 있는 참도가 없다  물론 배위도 없고   여기 광릉에만 왕릉중에 유일하게  없는것이다

예감은 있지만 산신석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사진   사릉  (2013년 5월5일 광해군 사릉,문재산 라이딩후기 )

신도=== 신이 지나는길

어도=== 임금이 지나는길

배위====홍살문아로옆  임금이 4 번 절을 하고  어도 로 나아간다

예감=== 제사를 지내고 난 축문을 태워 재를 넣는곳




좌측 세조릉  정희왕릉보다 조금높은곳에 있다


정자각


중앙에 정자각이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능이 있는데 이와 같은 동원이강 형식은 광릉이 최초다. 문종의 현릉도 동원이강 형식이지만 광릉의 조영 시기가 앞선다.

 그런데 능은 두 개이지만 정자각이 하나라는 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각 능마다 정자각을 하나씩 세우면 문제가 없는데 정자각 하나로 양 능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조와 정순왕후의 사망 연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조는 1468년에 사망해 정통 범례에 따라 왕릉을 축성했다. 그때 정자각도 조성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1483년에 정순왕후가 사망해 동원 이강으로 별도의 능을 만들자 기존에 설치된 정자각이 예상치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전통적인 개념에 의하면 장례는 흉례이고 제사는 길례다. 세조의 능이 완성된 후 정순왕후가 사망했지만 정순왕후의 시신을 세조의 정자각에 모실 수 없었다.

정순왕후의 시신은 흉례에 준하므로 길례를 기본으로 하는 세조의 정자각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묘수가 도출되었다. 가정자각(흉례 건물)을 지어 왕비의 시신을 모신 후 3년 후 두 왕릉의 중앙에 새 정자각(길례 건물)을 지어 둘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왕릉에는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곳은 소나무가 능침 배면에만 일부 있고 넓은 산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 전나무이며 광릉 입구에 근래 심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유명한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의 후계목이다. 이들 소나무가 광릉에 심어진 것은 세조와 정이품송의 인연 때문이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은 높이 15미터, 가슴 높이의 둘레 4.5미터의 거수로 수령은 600년 정도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 가지에 걸릴까 염려해 "연 걸린다"라고 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가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일행은 서울로 돌아갈 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이 나무 아래서 피했다고 한다.

신기하고 기특한 마음에 세조가 소나무 가지에 친히 옥관자를 걸어주고 후일 정이품 벼슬(장관급)을 내렸다.

 이 고사로 이 나무를 '연걸이 나무' 또는 '정이품송'이라고 부른다.





우측 정희왕후릉과 비각


좌측  귀신이 올라간다는  신계      우측   왕이 올라가는  어계    올라갈때는 반드시 오른발부터 딛고 올라야한다


능침은  가까이서 는 보도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본다

왕릉을 답사할 때 많은 사람이 불평하는 것 중의 하나는 능침을 공개하지 않아 왕릉 주위를 먼 곳에서 보거나 능침 인근에서 헛돌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일부 왕릉은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선조의 목릉, 숙종의 명릉, 세조의 광릉 등이다.




명 영락제

조선 세조

둘 다-

장조카를 지기고 왕이 된 인물


영락제의 장릉

세조의 광릉

결국은 다

땅속에서 썩어 없어지다





세조가 능을 간략하게 조성해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고 민폐를 덜라고 했지만 능이 갖고 있는 기본 시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광릉은 왕릉과 왕후 능 각각 곡장 3면, 난간석 12간, 석상 1개, 장명등 1개,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호 2쌍, 석양 2쌍을 두었으며 그 외에도 정자각, 수라청, 능표, 홍살문, 재실이 있다.

광릉은 6·25전쟁의 흔적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자각을 올린 정면 석대를 보면 수많은 총탄 자국이 보인다. 배위청 원형 기둥의 총탄 흔적은 고리를 박아 엄폐했다. 영조가 세조 등극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비각 내의 능표에도 흔적이 보인다. 세조와 정희왕후 능침의 석물에도 총탄 자국이 많이 있는데, 정희왕후의 능침에 있는 좌측 석마 한 개는 원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우측 무인석은 두 동강 난 것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신계 도 어계도 아닌  일반 신하나 재사에 관련된사람(재관)과    물건들이 왕래 하는곳

재를 끝내고 왕도 이곳으로 혼자 내려온다.   내려 올때는 반드시 왼발부터 딛고 내려 와야 한다



야심-

단종이 즉위하고 (12살)  명나라 사은사(명나라한데 즉위 허락받으려감) 로 자청하여 가는 수양은  평소 내편으로 끌여들여야겠다고 생각한  동갑내기 5개외국어

실력자 신숙주와 동행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고   일을 마친뒤 의기투합하여  찾아간곳은  영락제(永樂帝) 의 장릉(長陵)

영락제가 누구인가   태조 주원장의 4 째 아들로   그의 장조카인 혜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인물 이다

두사람은 거길 왜 찾아 갔나.... 또 무엇을 꿈꾸었으며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세자가 등극했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 무인 세력을 거느리고 야망의 기회를 엿보다가, 단종 1년(1453)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해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했으므로 주륙했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라고 사후에 임금에게 아뢰었으며, 곧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 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후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강화도에서 사사했다. 이후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양위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오르고보니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세조의 처신에 반대해 상왕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귀향 갔다. 세조가 왕권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생각한 신하들은 세조에게 충성을 거부했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있을 때부터 공문에 '신(臣)'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세조를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성삼문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겐 두 왕이 없다"라고 하며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유응부는 가혹한 고문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이개와 하위지도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갖은 고문에도 늠름한 태도를 보였다.


단종을 향한 충성심을 꺾지 않자 세조가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해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조에 대한 후대인들의 역사적 평가는 팽팽하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여버린 냉혹한 야심가라고 혹평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의 치적에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고 인정하는 학자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 6조 직계제를 부활해 왕권과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세조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국방력으로 호적·호패제를 강화하고 전국을 방위 체제로 편성했으며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했다.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국토의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해 각 도에 둔전제를 실시했다.

 또한 과전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해 국가 수입을 늘리는 등

조선 왕조가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실록세조-

음악에 탁월한 재주를 보인 세조의 또 다른 면은 어느 왕보다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많이 베풀었다는 점이다.

실록은 세조의 설작(設酌)을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신하와 함께 거나하게 취한 인간적인 모습도 있지만 공신들을 결속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세조는 술자리 이상의 무절제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이는 세자를 향한 절제의 가르침에서도 나타난다.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내가 본래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너(예종)와 여러 장상(장군과 재상) 등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절대로 궁첩(宮妾)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아니했다.             이는 네가 보는 바이다."
  
실제로 세조는 후궁을 한 명만 두었으며 술자리에는 조강지처인 정희왕후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년에 세조는 궁을 나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옛집을 찾았는데, 이때도 정희왕후와 술자리를 같이했다.



문수보살-

왕이 되었다고 만사가 세조의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권을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이 꿈에 자주 나타났고 어느 날은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세조는 침을 피하려고 몸을 돌렸지만 등에 맞고 말았다. 그 뒤로 세조는 침을 맞은 부위에 등창이 나 평생 고생했다.


어느 날 세조가 오대산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다가, 계곡에서 잠시 쉬면서 몸에 난 종기를 보이지 않으려고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자 한 명이 노는 걸 본 세조는 등을 좀 씻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뒤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라고 했다.

당시의 법도로는 왕의 몸에 아무도 함부로 손댈 수 없으므로 동자는 이를 어긴 셈이 된 것이다.


그러자 동자도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제야 종기가 씻은 듯 나았음을 알았다.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했고,

 이것을 동상으로 조성한 것이 현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 보관된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라고 한다.



세조와 고양이-

상원사에서 병을 고친 세조는 다음 해에도 상원사를 찾아 법당으로 올라갔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상하게 생각한 세조가 밖으로 나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니 불상 밑에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때문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 밭'이라는 뜻의 묘전을 내렸으며, 서울 인근 여러 군데에 묘전을 마련해 고양이를 키웠다.

 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밭을 얼마 전까지 묘전이라 부른 까닭도 여기 있다.

또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동자상이모셔진 청량선원 입구 계단의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상원사 고양이.jpg



공양미-

속설에 의하면「공양미」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하여 생겼다는 일설도 있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 준  도량을 중창하여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
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왕은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올렸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앉아 공양 채비를 했다.

『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아니오. 과인은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오히려흡족하오.』
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전을 향해불쑥 말을 던졌다.
『이거사, 공양하시오.』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아닌가. 『과연 도인될 그릇이로다.』
왕은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시로서 친히 전홍대(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허리를 졸라매 주는 풍속이 생겼다한다.



상원사동종-

세조가 문수보살을 만나 종기를 고쳤다고 알려지는 상원사

상원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동종(국보 제36호)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에밀레종보다 45년 앞선다.

이 종이 상원사에 오게 된 이유도 세조와 관련이 있다.

 세조가 상원사에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선정했는데,

 바로 안동 누문에 있던 종이었다.

 이것을 1469년 현재의 상원사로 옮겼는데,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종이 꼼짝하지 않아 종유 하나를 떼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을 입증하듯 지금도 유곽 안에 종유 하나가 없다.

2011년 12월 3일  2박 3 일 오대산 라이딩중 동종을 보고왔다



말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 세조는 1468년에 원상제(院相制)를 설치했는데,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정무 처리에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며, 후사의 장래를 부탁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9월 7일 왕세자에게 전위한 뒤 이튿날 사망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세조가 사망하기 직전 천문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이다. 9월 2일에서 4일까지 사흘 동안 혜성이 연속해서 나타났고 9월 6일에도 나타났다.

당대에 혜성은 큰 변괴를 의미했으므로 한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세조가 혜성의 등장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는지도 모른다는 설명이다.



뒷이바구 문종독살설-

잘 알려지지않은 이바구지만  문종이 일찍 비실비실(?)  하면서 당뇨와 잦은병치례 즉위3년만에 죽은 원인이 수양이 구랬다고 숙덕대는무리가 있었다

문종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종기가 있었는데  수양이  문종 종기 고치는 전순의 라는 어의를 꼬셔서  고치기는 커녕  병을 더 악화 시키도록 처방 하여

일찍 죽게 했다는 설이다,  나중에 수양이 왕이 된후 그 어의가  무신영문인지  1등 공신으로  올랐다는것만 바도 의심이 가는대목

암튼 증거는 없고  정말 그랬다면 수양은 대단한 야심가이며  나쁜시끼겠지..   왕인 지형을 듁였다면 말이다...




가장많은사람을 죽이고 가잔나쁜짓 많이한 세조-

--문종독살설 이 나돌지않나  설이야 거렇다 치더라도    황보인,김종서외 계유정란 당시 살생부에 적힌 인물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걸 시작으로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사육신을 비롯하여  그 외  가담자들 가족들 까지  그 많은 사람들 다 죽였고  

    조카 단종이야 말할나위 없지만  친동생인   양평대군, 금성대군  을 귀향지에서 죽였지

   그라고 동생둘만 죽이나 그 둘동생들 알고 지내던 모든사람들 한꺼번에 다 죽여버린다.


   현덕 왕후가 꿈에 나타나 괴롭힌다고 형 문종 묘를 파헤쳐 형수인 현덕왕후시신을  비만오면 잠기는 곳에 이장해버릴지 않나

   무덤을 관리하던  죄없는 그가족들모두 까지  무덤앞에서 다 죽여버린다.


   아버지세종 의 후궁인  헤빈양씨  또한 단종복위에 가담했다고 그 가족들까지다 죽이고 몰살 시켜 버린다  아버지 후궁이면 지한덴 서모인데도 말이다.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켜버렸다.

    성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친동생으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막내아들이다.


   친족,  형제, 일반인 , 서모, 노비 , 친구  닥치는데로 걸리적거리면 다 죽인다    송현수는 절친친구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아버지  거러니 단종의 장인어른

   애당초 단종과 인연을 맺은 것도 수양과 친구므로 연줄로 자기가 만들어 결혼시켜놓구선  복위운동에 가담햇다고 죽여버린다  절친을.


  정신병자 같은 이왕은 이놈 저놈 다 죽여놓구선  지가 왕이 되는데 도움을 준 공신들한데  퍼줄건 다퍼준다   돈이며 땅이며 

  죽이고 여분으로 남은 여자들은 노비로 첩으로 전부 선물로 다준다   공신중 홍윤성이란 미친개 같은넘이 있는데  온갓 악행을  죄없는 백성들한데

  저질렀는데도  죄를묻기는커녕  모르쇄로 일관하며  원성을 쌓기도 하는데 도데체 이해가 가질않는부분이 많다


   한마디로 친족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없이 태종조차 하길 꺼려한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서모, 이복형제에 더해서 친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그래도 처복은 있어 대장부같은 마누라 정희 왕후가 곁에있어  왕이되고    그 업보 또한  마누라가  많이 갚는다

경헤공주 자식들을 보살피고 훗날에 성종의 수렴청정을 할때도  세조의 업보를 대신해  그 악행을 용서 받듯  애쓰니

마누라 복은 있는게 아닌가...




재실= 능에딸린 재실이다   고급살림집의 형태이며  행랑채와 그밖의 부속건물들을 거느린다

        이곳은 재관들의 재사준비와 휴식을 위해 사용 되었으며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저주하는곳이기도 하다

        



광릉의 원찰이다.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가 창건했고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창되었다.

이름도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를 담아 지었으므로 광릉과는 한 짝 같은 존재다.

 한명회, 구치관 등이 책임을 맡아 건설한 사찰로 왕실 원찰 중에서 으뜸으로 대접받았다.


봉선사는 흥미 있는 용어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법석은 원래 불교 용어로 '법회석중(法會席中)'이 줄어든 말이다.

이는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이 둘러앉아 불경을 읽는 법연을 일컫는 말로서,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했다. 그런데 봉선사는 신자가 많아 법당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법당 밖에서 법회를 여니 주위가 산만해져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봉선사에서 유래되었든 아니든 시끌벅적하게 떠든다고 할 때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설명도 있다.







봉선사는 세조의 원찰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비롯해6·25전쟁 등 여러 전란 때마다 화를 입어 현재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건물은 없다.

하지만 봉선사에 있는 대종(보물 제397호)은 아직도 현장에서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이는 예종 1년(1469)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238센티미터, 입 지름 168센티미터, 두께 23센티미터, 무게 1,500킬로그램에 달한다.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 수법 등은 조선 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봉선사 연못


봉선사 연밭


6월의 햇살 치고는  너무 뜨겁다,  도로에는 3일 년휴를맞아 쉴새없는 차량의 행렬로  잔거가 낄틈이없고

잔차 전용도로로 가야쥐  자동차사이로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으로 맑은공기고 자연이고 나무고 머고 나발리고 간에  겨우 빠져나와

왕숙천 잔차길로 들러서다


바로 앞에 경복대 싱글 능선 길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고선  날 유혹하는데....  날씨가 넘 덥고 시간도 여유가 없어

김유신이 애마 목치듯   유혹의 손길을 과감히 자르고는  왕숙천 물길따라 구리로 힘차게  패달 돌린다.


조선 왕중에 가장 악질적인 왕을 만나고 돌아가는길이라 거런지     날씨마져 개똥같이  후덥지건하게 지랄같구만..


아고 더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