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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6-----남양주---------나들이(다산유적지)

단석 2017. 2. 28. 09:42



서울-다산유적지.gpx




"당상(심문 담당관)이 그 편지를 보았다면 알 것 아니오?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소이다.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 동생으로서 형을 증언할 수는 없소."



위증(거짓증언)을 하면 임금을 속여서 불충(不忠)이 되고, 사실대로 말하면 형을 고발하는 불륜(不倫)이 되는 것이다. 위의 말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불충불륜에서 벗어나지는 않고 결코 거짓말도 아닌 명답이라고 칭송했다.


다산을 아끼던 정조가 승하하자   공서파는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구실로 남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다산 형제들도 끌려가 모진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다산의 둘째 형인 정약전과 셋째 형인 정약종 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다산은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특히 형관(刑官)들은 오고간 편지 속에 나타난 괴수(우두머리)는 그의 형 약종이 아니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겨울를 벗고



대나무 몇 가닥에 새벽달 걸릴 적에
고향이 그리워서 눈물 줄줄이 맺히오  -다산-






코펠속에서

김치와 돼지고기가 보글 보글  끓고 있다.


더불어-


이슬이 두병과 라면두봉지도

서둘지 않으며 대기하고 있고,


끝나지도 않은 차가운 계절를 쓸어안고서


가끔 지나는 객과 쌍들과 또는 애들이

신기한듯 힐끔 힐끔바라보면서 지나쳐 가지만


아랑곳 없이-


내창자속으로 곧 밀어넣을 것들만 바라보며

시끄러운 탄핵 이바구만 하고 있다.


그냥 신기해서 사왔다는 튀긴 건빵을

무의식적으로 집어 어거적거리면서

어수선한 세상 이바구만 하고 있다.


촛불도, 태극기도 다 잊고선

춥고 ,어둡고, 긴  터널에서  아무탈없이 출하여

.

.

 따뜻한 봄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두눈을 크게뜨고 보아도 보아도 맞았다

 나비가 ....것도 아주큰 나비가

폰카에 나빌 담겠다고 뛰가던 칭구는

끝네 놓치고선  ...


나넘도 우리들도 참 

와 거리 조급 하노...




반주로 먹은 이슬이가 

숨었던 낙이 봄날를 제촉한다


다산도 술를즐겨

술이 원기와 화기를 돕는다고 믿었기에

자식에게도 술를 권하였고


다만

곤드레 만두레 되도록 먹지는말라고 하였다지 아마

그랫는지몰라도

다산이 그 험학한 당파 싸움소용돌이속에서도

명을 부지하고 장수한 고로.


한  잔   ?





정약용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18세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상가.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했다.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여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음모로 유배 생활을 하는데,

 이때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그는 봉건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 개혁안을 내놓았다.

정약용이 저술한 일종의 행정지침서인 《목민심서》는 그의 저술을 정리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거중기

1792년 도로래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




 알아주는 자는 적고 비방하려 드는 자는 많으니,

 만약 천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줌의 불쏘시개로 불태워버려도 좋다.


다산이  도탄에 빠져 고생하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심혈을 기울려 저술한  " 목민심서 "   가  알려지지도않고  읽혀지지도않고  쓰여지지도않자

현실를 한탄하며    회갑을 맞이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적으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본시 남을 칭찬하기보다는 시기하고 비방하는  편향으로 치우쳐져있다.   그편향을  학문과 도덕과 인격수양등으로  바로 잡아가야한다.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자신을 돌아보며 사회적 일원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며 살아가는 인간은 되지말야야하겠는다는....

오늘 ...........잠실철교아래서 하루를 넘어보내는 노을를 바라보며    다산의  글들를  훌터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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