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7320-----남양주--------다산3,5길,문안산85

단석 2017. 3. 20. 11:58





남양주-슬로시티다산길8.gpx








남양주=다산길몽땅.gpx





남양주-다산3,5길갑산68.gpx




갈라꼬 했는데....






남양주-성내천,다산3,5길문안산85.gpx


갔다오니 85 km  이더라    이른아침부텀 죙일 돌아다녔다






남양주-다산3,5길문안산38.gpx




바닥을 들어낸 팔당댐아래





고요하고 시원한 날에

2017 년 3월 19 일에

언넘이  나들이 나섰다.


마이도 배우지도 못하고

마이도 가진것도 없고

글타고

인간성 조차 마이도 좋지못한넘이

다산 길이란 곳으로  나들이 나왔다.


다산 정약용 이란분은 마이 아는분이제..


삐까뻔쩍 외재차는물론

제대로 굴러가는 국산차도 없어서

그냥

잔차 타고 나왔다.


차들이 못다니는곳

호젓하고 조용한 산길로 들왔다.


산솔 냄새가 향긋한곳으로

산 바람이 때론 불고

산새가 가끔 지지대는곳으로


잔차 타고 나왔다

그냥 그곳으로...







4-- 싱글 날머리


이덕형--

오성과 한음’이라는 호로 조선 시대 명콤비로 잘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 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맞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재상들이다. 특히 이덕형은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시의적절한 외교를 한 외교관이기도 하다.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이다.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과 유씨 부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영민하고 학문에 통달해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고, 1583년(선조 16) 대제학 이이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사가독서를 했다.

 그 뒤 부수찬, 정언, 부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동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대사헌 자리에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만나 왕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등 전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차분하고 진중한 성품을 가진 이덕형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글을 잘 지었다. 열 살 무렵 칠언절구(七言絶句)에 탁월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네 살 때는 외삼촌  따라 포천 외가에 가서, 그곳에서 문장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양사언(楊士彦), 양사준(楊士俊), 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사귀며 시를 주고받았다.

 양사언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이름난 인물이다. 양사언 형제는 이덕형의 글솜씨에 늘 “군은 내 스승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덕형은 열여덟 살에 생원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진사시에는 3등으로 합격하여 마침내 스무 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스물다섯 살이던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해 두 사람이 함께 승문원 부정자를 지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 두 사람이 등과한 해에 이덕형의 일가인 이정립(李廷立)이 함께 등과했는데,

이들 세 사람의 문재가 뛰어나 ‘경진삼이(庚辰三李)’로 불렸다. 또한 이 세 사람은 홍문관 관원으로 나란히 뽑히기도 했다.


1908년 광해군 즉위와 함게 영의정으로 복귀한 한음 이덕형


그러나 그는 광해군이 여러모로 빚어내는 마찰을 몸소 겪으면서 관계에 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덕형은 마침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벼슬이 박탈되는 삭직(削職)의 아픔을 겪었다.

1613년 대북파의 충동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했다.

 이덕형은 이원익 · 이항복과 함께 이를 크게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곧장 행장을 꾸려 양근(楊根)에서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2--

한음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400 년이 훨신 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태까지 내가  이곳을 찾을때  까증 꾿꾿히 버티고 있습니다

울 사람들은 새로 짓고 뿌수고 다시 짓고  고치고  생 쇼를 다하지만  이 나무만은  구냥 그자리에서  구냥 이태껏 얌전히 서 있슴다..

영원하냐고요  //  아니겠지요       언젠가는  이 나무도   세상에서  잊혀지며 울들 가슴에서 사라지겠지만서도   ... 말 입니다

암튼 말입니다    세상에서 지가  젤 이라고 떠들고 지럴을 하고  발버둥 치지만요   100 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요기 은행나무는 입 꾹 다물고 잘난체 아니하고서는   400 년을 더 버텨온것입니다...... .............


아이고   어른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2리.

북한강 가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조선시대엔 용진(龍津)이라 불렀습니다.

운길산 수종사 아랫마을이죠.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이 별서에서 죽은 장소가 있는 곳입니다






한음 이덕형 선생은 부친을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위해

산수가 빼여난 이곳에 별서인 대아당을 지으셨다

선조 33년 (1605년 )  45세 때의 일이다

현재는 공이 말을  타고 내리던 하마석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무렵 공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 두그루는

공의 고귀한 얼이 서린듯  지금끗 꿋꿋히 서있다.


3--



5--



6--재재기고개

                         고행의 시작


7--내가 발견한 연리지 나무 ( 주변 나무 가지들로 보아서 아마도 내가 처음인듯 )




문안산 정상


너무 힘들게 온 탓에  정신이 혼미해져  치메걸린 노숙자 마냥  뒤적 뒤적  가방에 슈셔넣어둔 먹을것이란 죄다 꺼낸다

어쩌면 죽을수있다는 현실에서 본능적으로 살아야쥐 하는듯이...

나중에야 알수 있지만 다음 산에서 먹어야지 하면서  다 먹지도 못하고 아껴둔 저것들중 몇개는  결국엔 집까지 들쳐 업고 왔다는 사실..





문안산 정상에 서다

.

뭐 있어야 하는데..?

암것도 없구만


그냥 내머리마냥

뻘건 속살을 들어낸

짱빼기 뿐이구만


시부랄거

이거 볼라꼬 기를쓰며

죽을뚱 살뚱 기어 올라왔나


이거볼라꼬

저 아래 시원스레이 흐르는 물길도 버리고

쭉쭉 뻗은 존 길도 버리고

나무도, 집도 다 팽기치고

개떡 같은 길도 아닌이길을

잔거 메고 올라왔나..?

데체 이게 먼 지랄이고..


아래서 쳐다보면

먼 큰 이상이라도 있을까바

먼 큰 복덩이라도 있을까바

먼 큰 행복이라도 있을까바

보일지 몰라도

.

없다


니주변에서 그냥 찾아라


코구멍에 공기 잘 들락 날락하는기

고기 바로 행복이고 복덩이다


니가 쳐다 보고 올라오는즉시로

고깐들은 죄다 하산하고 없다


니기미

목숨걸어 올라왔띠마는

저거 우에 갔고왔나 하는 정상석하나 하고

말라비틀어진 떡갈나무 몇그루와

폐집 삐죽나온 철골과도 같은

발 뒷굼치같은 뿌리몇개들 밖에 안빈다.


저 아래로 하산한 그넘들을 찾아서

다시내려가야한다


알고 있다 이젠


내가 내려가는 즉시로

그넘들은

바로 다시 여기로 올라와 있다는걸


인간들은

그렇게 속고  또 속으며

 살아가고 있다


나도

그리고 너도


문안산 정상에 서다.







오늘의 보상길


고난의 길


아래 피아노 카페


문안산은 잔차 길이 아이메    이쪽 방향이던 저쪽방향이던 가지마소


넘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 꼬꾸라졌으며  우리 산잔차 타는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심었다고 한다

심었다    길이 젯트 같이 꺽어진 길이라 핸들 바를 너무 꺽어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다행이 헬멧을 쓴관계로  돌뿌리에 쳐 박았지만  다친곳은 없다   머리를 아래로  까꿀러 누워서  하늘을 보면서 사진 찍는다


그라고 보이------하필이면  내 카본휠이 정확히 빠져나온 돌탱이 위에  딱~~~~~~~~~~~~

허---걱~




8--피아노폭포




지다가

끌다가

길에다 내 팽게 치고서는

산아래

북한강을 내려다 본다




메고도 갈수없고     끌고도 갈수없고  타고는 말할것도 없지


9--날머리


다 왔다

목구멍에서 단네가 난다


다시는

잔차 메고

문안산을 찾지 않으리라


목구멍 저 안곳에서

꾸역 꾸역

가슴 저민 타고 난 잿떠미 같은것이

밀어 붙인다


입에서 맴돈다


시팡  시팡 육두문자가

쉴세 없이

나온다


2 시가 넘은 시간에  겨우 먹을곳을 찾아  배를 채운다    춘향전에  거지 이도령  두꺼비 파리채듯 허겁지겁 굶주린 배채운다 했지만

하두 힘드니  배는 분명 고픈데  집어 넣기가 쉽지가 않다. 

창가 북한강 강물이 이뿌게 흐른다. 

두 젓가락으로 휘적 휘적 다 뒤집어 놓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 겨우 입으로 집어 넣는다.

열나게 고생하고 이렇게 먹을때 .... 이 맛은   아는사람만이 안다.


남은 길은 ..?   생각하기도 귀찮다



양수 철교


양수 철교 아래서


다 벗어 던지고

잔차 까지도 집어 던지고선

들어 누웠다


매번-

후회와 낙심의 응어리가 용솟음 치던날


다시는

다시는

하지만

오늘또

들어 누웠다

.

.

.

눈을

감는다....



능내역 음악회


강동대교


올림픽대교



 바람같은 인생 / 임지훈


길지도 않은 인생 남김없이 사랑하련다
     들을 건너 스치는 바람 인생이 바람이라면
     가다 꽃보면 꽃본듯 여울목에 쉬다 또 흐르고
     뒤돌아볼 겨를없이 넓은 들지나 강뚝에 서네
     길지도 않은 인생 미련없이 보낼 수 있나


     청춘고개 넘어넘어 저 아래 저 마을로
 걷다 하늘이 서럽고 서러우면 눈물 또 흐르고
     바람소리 나그네 노래 여윈 귓가에 들리어오네
     길지도 않은 인생 남김없이 사랑하련다


     길지도 길지도 길지도 길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 미련없이 보낼 수 있나
     길지도 길지도 길지도 길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 남김없이 사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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