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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3-----1박2일(1)평창--------- 오대산

단석 2011. 12. 4. 20:55

 

첫쩻날 = 주차장 - 관대거리 - 상원사



둘쩻날 = 관대거리 - 상원사 - 1 - 중대사자암 - 적멸보궁

           

           -  오대산정상 비로봉(1563km) 을 갈려고 했으나 산불방지기간(15일) 중이라 폐쇄 되었다.( 녹색선)

            - 황색선 임도도 폐쇄 ( 옛적엔 잔차가 다녔다는데)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와 함께 월정사(月精寺)를 품에 안고 있는 오대산(五臺山).

백두대간이 힘찬 기세로 금강산, 설악산을 지나 대관령, 태백산, 소백산으로 이어지는데 백두대간이 대관령을 넘기전에 곁가지 하나를 늘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차령산맥으로 이 산맥은 치악산을 걸쳐 충청남북도를 관통해 서해의 대천 앞바다로 이어지는 성주산에서 마감한다.

백두대간이 차령산맥으로 갈려나가는 지점, 즉 차령산맥의 발원지가 되는 곳우뚝 솟은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삼신산(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국내 제일의 명산으로 꼽던 성산이다.

오대산은 해발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동대산(1,434m), 두로봉(1,422m), 상왕봉(1,491m), 호령봉

(1,561m) 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동쪽으로 따로 떨어져 나온 노인봉(1,338m) 아래로는천하의 절경 소금강이 자리한다.

 

원래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으로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공부했던 곳이다.

그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의 한가운데 있는 산의 형세를 보고 중국 오대산과 너무나 흡사하여 이 산을 오대산이라 이름붙였다고 옛문헌에 전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오대산국립공원이다.

 

강원도 강릉시, 홍천군, 평창군 등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오대산은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면적이 303.929평방 킬로미터에 달한다.
연간 100만명의 탐방객이 찾아오는 이 산은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을 비롯해 온 산이 아름드리 전나무
로 빽빽이 들어차 수목군락의 절경을 보여주며,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를 잇는 능선의 완만한 곡선은 한국의 미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노인봉을 시발로 동쪽으로 펼쳐진 소금강은 기암들의 모습이금강산을 보는듯하다고 해서 소금강이라 부르고,

또 학의 날개를 펴는 형상을 했다고 해서 일명 청학산이라고도 불리운다.

 


고속도로를달려-  오대산으로


차창으로보이는 설경도 아름답다


 

몇일전에 라이딩한 청태산 능선이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월정사 가는 울나라에서도 유명한 전나무길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서기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자장이 창건할 당시에는 초암(草庵)으로 엮어 만든 임시암자에 불과했지만,     그뒤 신효(信孝)·신의(信義)·유연(有緣)이 차례로 이곳에 머물면서 점차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적기 寺蹟記〉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큰 불이 일어나 불타버렸으나 이일(而一)이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정암(淨庵) 등이 재건했는데,

1·4후퇴 때 군사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하여 1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때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되어 이 절에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 동종(804)도 함께 불타 녹아버렸다.

그뒤 1964년에 탄허(呑虛)가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만화(萬和)가 계속 중건하여,            현재는 대강당·삼성각·심검당·승가학원·용금루·일주문·요사채 등이 있다.

 

 

월정사 전나무

월정사 전나무에 얽힌 설화 한 토막.

고려 말 오대산의 북대암(北臺庵)에서 수도하던 나옹 혜근(懶翁 慧勤; 1320-1376)은 매일 월정사로 내려가 부처님께 콩비지국을 공양 올렸다.

어느 겨울 날 혜근이 비지국을 받쳐들고 눈길을 조심스레 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떨어져 혜근을 덮쳐 비지국을 쏟고 말았다.

혜근은 격노하여 "네 이놈, 소나무야, 너는 부처님 진신(眞身)께서 계신 이 산에 살면서 언제나 큰 은혜를 입고 있거늘,

어찌 감히 네 마음대로 움직여 공양물을 버리게 하느냐"라고 꾸중했다.
마침 산신령이 이 소리를 듣고 "소나무야,   너희는 큰스님도 몰라 보고 부처님께도 죄를 지었으니 이 산에
살 자격이 없다.      멀리 떠나거라.

이제부터는 전나무 아홉 그루가 이 산의 주인이 되어 오대산을 번창케하리라"하고 말했다.

그 뒤부터 오대산에는 지금까지 소나무가 없고 전나무가 번성한다고 하며,  지금도 당시의 아홉 그루 전나무 중 두 그루가 일주문 가까이에 유독 큰 키로 서 있다고 한다. 

 


동피골 야영장 주차장 도착-  관대거리까지 못가게 여기서부터 통제한다

 

주차장주변


 

주차장에서 관대거리 가는길--동피골

 

 

 

 

 

 

 

 

관대거리    임도는 폐쇄되었고


상원사 입석에는 위와같이  적멸보궁  과 문수성지 라고 낙관을 찍은것같이 표시해 두고..


 

상원사 올라가는길은 그야말로 천국가는길같다..


 

자연이보여주는 걸작품


 

상원사 올라가는계단   잔차는 돌아서


 

 

 

 

상원사 전경

이 절은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동쪽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에는 일만관음보살을, 서쪽에 있는 장령산(長嶺山)에는 일만대세지보살을, 남쪽에 있는 기린산(麒麟山)에는 일만지장보살을, 북쪽에 있는 상왕산(象王山)에는 일만미륵보살을, 중앙에 있는 지로산(地盧山)에는 일만문수보살을 첨례(瞻禮)했다. 그뒤 성덕왕이 된 효명이 다시 이 산을 방문하여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그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시간이없어 동종도, 탑도 못보고 서둘러 내려온다


상원사동종(퍼움)

 

상원사 동종은 국보 36호이구요. 725년에 구리 3300근을 녹여서 만든 최고 오래된 종이랍니다.

 

 천판 명문에 의하면 휴도리라는 귀부인이 기증한 것인데요.

 

 

 

통일신라시대 주조기술과 조각수법이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종소리 여운은 애절

 

 

 

하면서 멀리 백리 까지 들린다고 합니다.

 

 

 

 

 원래 어느 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는 안동 남문 누각에서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했

 

 

다고 합니다.

 

 

 

 

왜? 이 종이  상원사로 옮기게 되었을까요?

 

 

 

조선 7대임금 세조 ---

 

 

그는 어린 시절 진양대군으로 봉해졌다가 세종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고 어린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왕의 보좌 역활을 맡다가

 

 

 

계유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뒤 1455년 윤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권을 빼앗아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금성대군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연거푸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김종서 황보인등 단종의 충신들을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

 

 

 

마저 가차 없이 처단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 시켜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서인으로 강봉 시켜서 죽였습니다.

 

 

 

 

 나이어린 단종을 임금에서 내치고 사약까지 내리니 단종 어머니 권씨부인이 꿈에 나타나 세조를 꾸짖고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

 

 

 

 졌는데 어떤 연유인지 금새 세조의 아들이 죽고 세조도 침 닿은 자리에 극심한 피부병이 생겨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즉위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려서 산천유람을 많이 하게되는데 어느해 고을 나들이를 가다가 상원사를 찾게 되

 

 

 

었는데 맑은 물을 보고 목욕을 하던 중 등에난 종기를 씻고 싶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동자승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부탁하자 어찌나 시원하게 밀어주던지 종기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어디가서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승은 임금님께서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하

 

 

 

지 마세요’라고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동자승은 간곳없고 자기 몸에난 종기가 그후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죠.

 

 

 

 크게 감격하여 절에 종을 보시하기로 맘먹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종을 구하라고 명령하니 당시 안동 문루에있던 동종을

 

 

 

찾아 상원사로 옮겨오게 되지요.

 

 

 

 

 안동에서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

종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험한 큰 고개길 죽령을 넘고 또 넘어야 했으니까요.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은 죽령 고개에 이르러 꼼짝 달싹도 않는 것입니다.

 

 

 

많은 인력과 우마가 동원되어 이동 하던 중 갑자기 수레가 움직이지 않았지요.

 

 

 

 

갖은 방법을 동원 해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아서 운종도감은 그 오랜 세월을 지켜온 고향을 못 잊어 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종의 유

 

 

 

두를 하나 떼어 안동 문루로 보내고 나니 수레가 움직여 상원사까지 무사히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원사 동종에는 유두가 하나 없습니다.

 


 

 

오늘밤을 이 눈속에서 버티어야한다..   죽던 - 살던  헴릿의 독백이 아니라  현실이다.

내일 아침에 무사히 이아름다운 눈을다시볼수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