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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7-----서울-----------흥선대원군묘105

단석 2014. 10. 17. 22:23

 



서울-성내천,마석,대원군105.gpx


 

                             

 



 

남양주-모란공원,대원군23.gpx

                 

 

 

 

 

 

 

 

피아노 폭포

 

10월 24일 오전  동안 잔차타기에 정말 좋은 날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안장에 궁둥이 붙여본 때가 까마득한가   하는 날에

오늘은 무신 일이 생기더라도 나 몰라 하면서 11시쯤  잔차타고 무작정   일단 집을 도망쳐 나왔다  소박맞은 아낙이 서러운듯 꺼이꺼이 하면서  거리를헤매듯

한강으로 북으로 패달을 돌려 돌려 오다가 문득  아  거기----------- 일전에 지도를보면서 그려둔 흥선 대원군 묘나 함 가보자  하고....

한번의 쉼도 없이 새리 발고 달려온 곳이 여기   잠시 가쁜 쉼을 돌려본다  피아노 폭포

 

 

쳐다본다

 

피아노처럼 생긴 건물도

 

바로 도로를타고 묘로 갈수도 있지만 올만에 흔히 공동묘지에 있는 빨래판 업힐도 함 해보고 임도를 가고파서  돌고 돌아 갈요량으로

모란공원 업힐과 능선 임도를탄다.

 

모란공원묘지 능선에서

헥헥 거리면서 빨래판 업힐을 거처 도착한 능선 꼭대기--  아래를본다    먼져간 선배님들을.....

 

모란공원묘지 능선임도

 

이쁜 임도 능선 을 사부작 사부작---  좀 짧다

 

내려와서 묘지 사무실앞으로해서  길도 없는곳을 헤집고 나와서 찾아가는데..

 

이정표 부터가 초라하기 이를때 없는걸루 바서--- 실체도 거리하지않을까 싶기도하는데

 

하여간 길을 따라가본다  가을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고 공기또한 상큼하다

 

철문 우측에 이렇게 세워 놓았다

 

임도길인데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야하는데 이정표 하나 없다

 

다왔다      흥선 대원군     격동의 한시대를 주물렀던   이하응 흥선대원군

 

흥선 대원군(1820 ㅡ 1898)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 이구의 넷째아들.

남연군이,사도세자의 2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   남연군이 사도세자 손자 대원군은  사도세자 증손

촌수로 대원군은 영조의 고손.

그의 이름은 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였다.

 

 

 

 

12세때 어머니를 , 17세때 아버지를여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지금처럼 자전거나 있었으면  잔차나 타고 유람이나 하고 보낼것   자전거도 없는시절  가세는 기울고.....

타고난 명석한두뇌를  천재성인 그의 머리는   추사 김정희 제자로 들어가면서 서예.글씨.그림을 배우면서 그나마 빛을 발한다.

훗날에 난을 친 그림에 석파라는 낙관을 찍고 양반들한데 많이도 팔아넘겨 생활비로 충당하기고 한다

 

글씨와 난을 치는 그의 솜씨는   탁월했다   허나  당시는 어떠한 세상인가  세도 정치가 판을 치는 세상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가들은  왕족이라면  특히  똑똑하고 힘께나쓸 왕족이라도 있으면  싹을짜르듯  거 어떤 핑게를 대서라도 씨를말려 버리고

여자를 남자로 만든것 외에는 모든것들를 힐수가 있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나라의 모든 권력을 다 틀어쥐고 주물렀으니

가히 짐작이 가지 않는가  반면 백성들의 삶이란 비참할수밖에...

 


바람앞에 등불같은  왕족으로 태여난 이하응은  바로 위에 형이  그 세도 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걸 보고는 발톱을 감추고 비수를 숨기는데......

진정 파락호 의 길을 걷게된다                파락호(破落戶·재산·세력 있는 집안 자손으로 집안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

상가집 개  라는 별호를 들으면서 세상 모든 수모란 수모는 다겪으면서 목숨을부지하며 때를기다린다


 조대비와 처음대면 하는날  대비가   대감은 지금 세상이 어떠한 시국인것 같으냐며  청치적 의중을 물었을때    이하응 은 즉각 답하는데

 " 지금은 개 돼지가 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때를 기다려야할 것으로 아옵나이다 "

 

국태공원소

 

명당 이전


그 첫번째로  ---  2013년 3월 서산가야산 라이딩중 냠년군묘를지나치면서  언급했던 것을 다시 하자면

 

풍수와 역학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당대최고의 지사(地師) 정만인에게

남연군(이하응 아버지)의 묘자리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정만인이 2 곳을  지목한다 .

   

- 한곳은      오서산 자락으로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자리인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 또 한곳은  가야산 자락으로  2대에 걸쳐 천자(황제)가 나올 자리인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흥선군은 주저없이 가야산자리를 선택을 하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다.

 


연천에서 이곳까지 먼 거리를 상여가 도착되는고을마다 주민들이 차례로 상여를 옮겼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정만인이 지적해준 명당자리에는 가야사가 소유한 고려때 나옹화상이  세운 금탑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가야사는 백제때 겸익대사가 창건한 보통의 조그만 절이 아니고 무려 99 개 말사를 거느린 만평이나 되는 아주 큰절이였며 

그 절 중앙에 우뚝솟은 언덕에 탑이있었던것이다


아마도 이자리가 명당이면서도 흉지라  올라서지를 주체못하는 화기를 누르려고 절를 지었지않나  싶은데..


이하응은 재산을 모아 우선 절주지를 매수하여 중들을 하나하나 내쫓고선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수려는차(매천야록)


자신과 위 형제들 모두 꿈속에서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나타나  자기가 탑신이라며 왜 남의 자리를 탐하는냐고


만약에 내자리를 빼앗는다면  너희 가문을 멸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자 다른형들은 모두 무서워하며 그만두자고 하는데  이하응은


오호 거렇다면 그자리가 분명 명당자리가 맞기는맞는가보다하고  서둘러 처리하려 드는데   드디어 탑을 부수는그날


 갑자기 하늘에서   검은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치자   일하던 인부들이 모두 무서워 떨며 일을 멈추매  도끼를 낚아챈 이하응..

 


" 이나라 모든것은 이씨왕족 것 누구도 감히 의의 제기 할수없다" 라면서 직접 탑을 부순후    땅을 파내려가자  바로 큰바위가 있어 도끼로 내려쳐도 꿈적않자


이하응이  하늘를보며     " 나라고 임금의 아버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  라며 도끼로 내려치니  청  하며 굉음을 지르며 바위가 갈라졌다 하며

 

 한차례의 도굴이 있을것이라는  정만인의 말을 듣고         관위에 석회석으로  돌보다 더 단단하게 덮은후에 봉분을 만들었다 한다.

( 훗날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과 통상협상키위해 2 차레의 도글를 시도하지만 석회석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

 

이장한지 7년후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12살되던해 철종이 후사없이 죽으므로 가까운 종손이었던 그의 아들이  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이고 그다음이 조선왕조 최후의 왕인 27대순종이 됩니다. 

계해년에 흥선군 둘째아들이 왕이된다고 예언했던 정만인 ...

 

지사의 말대로 2 명의 왕이 탄생은 하였지만서도     이씨 조선은 탑신 노인 말대로 망한다.

2대에 걸처 왕은 나오지만 그이후엔 대가 끊기는  흉당인것을..


그렇다면 지사 정만인은 흉당인자리를 알았을까 몰랐을까   알았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왕권을 찾기위해 갈망하던 흥선에게

팔아넘겻던것이다 팔아?  정만인은 흥선과 약조한다  이대천자지지 자릴 알려주는대신  왕권을 회복하면 합천해인사 에있는 팔만대장경 을

맘대로 관리 할수있는 권한을 달라고...   오케이


드디어 고종이 왕위에오르자  이하응은  불태운 가야사지 맞은편에 다  고종의 즉위에 대한 은덕을 값는다 는 뜻으로 보덕사란 절를짓고 일말의 죄를 씻고자하는데

절를 지어 시주하고난 어느날밤    꿈속에서 노인이 다시 나타나 이러기를

왕조가 멸하지않고 존속할려면 만인을 죽여야한다고   마침그때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터지고 조사중 묘지안내를 천주교 신자들이 앞장서

하였다는 정보에 흥선은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여 8000 여명을 학살한다.  만인을 죽일려면 아직남았다

하지만 흥선은 천주교 박해를 하면서 일말의 양심이챙겨 잠못자며 곰곰히 생각도중...    부릅을 탁치며  아차  하며 ..

만인를 죽여?    만인 만인 ..사람숫자  만인이 아니고 지사 정만인이다 정만인  천기를 누설한죄로 정만인 을 죽여라하는뜻을...

나라를 뒤 흔들만큼이나  명당과함게 흉당인자리, 그강한 기를  누르려 절를짓고 금탑을 쌓아 있는걸 만인의 발설로  결국 나라전체가 흔들리는결과를 초래 했으므로..

 

흥선은 날이밝는즉시 사람을 풀어 해인사에 있는 정만인를 잡아 올리라 보내지만   이미 늦었다.

정만인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이잡듯 뒤져 독파를하곤  부처님의 지혜인 천하보물인 해인를 갓고 어디론가 도망간 뒤였다.

정만이를 죽여야 조선 이씨왕족이  존하는걸 흥선은 놓치는바람에  .....  망했져.   애꿋은 천주교인만 학살하여 역사의 죄인이되고.


후로 정만인은 역사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 전라도 군산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정만인은 해인을 가지고 남해로 갔다 하는데 )


   해인========== * 이 세계의 모든 중생 및 사물이 바다 가운데 도장처럼 깊게 비추어진다는 불교적의미  

                         * 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  걸로  " 진실된 세계 "  를 뜻한다

                         * 모든소망을 들어준다는 용궁의 여의주보


다시 본론으로돌아와---

묘를 이장하고는 호시탐탐 기회를노린다.  왕족이면서  시정잡배등과 어울리고  안동김씨 양반들한데  "상가집 개"라고 불리면서 온갓 수모를 감당한다

옷은 남루하고 다 떨어지고 거지와 다를바없는생활을 한다.  양반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하고 따귀를맞기도 하면서 명을 지속하는데

조금이라도 똑똑한척 하다간 목숨을 부지하지못한다는걸  본인은 알고 있었으리라.....

때를 기다린다.....   때를 기다린다---

 

때가 온다---

 

강화 도령이라는별칭이 있었던  철종이 갑자기 승하를 하것이다 .   철종이 누구인가   왕족이라면 씨를말리는시기에  자신이 왕족이라는사실도 모른체

강화에서 땔감을 지어 시장에다 팔아 연명을하고 있었던 철모르는 넘을  세도가들이 만만하니 대려다가 왕을 시켰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강화 도령이라는 별칭이 붙었던것이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어설픈 왕   철종을   시켜놓고는   지들 맘데로 휘둘고 웃고 떠들면서  미처

 담의 왕을 생각지도 못하던 때에    어느날 철종은 갑자기 죽어버린다.   병명이 지금으로 치면 매독이래나 머래나...

 

암튼  35세에 후사도없이 갑자기 죽어버리니  졸지에 왕이 없는사이  당시 안동김씨 수장이였던 김좌근도  멍하니  어찌 할바를모르고 우왕좌왕 하는사이

왕이 없으니 궁궐의 최고 어른은 당시 조대비였다.   바로 풍양조씨 세도가중의 수장  즉시 옥쇄를 품에 안고 있으니 대장이다

 

이럴때를 대비 하여 우리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미리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터   바로 조대비와 밀약을 해둔게 있다

혹시라도 왕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자기 둘째아들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달라고......조대비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하응이 병신같이 거지같은 바보같은 넘이다보이   만만할것이고  또 이하응이 왕의 아버지라고 나설일도 없을것이고  또 안동김씨문중에서도

안된다고 반기를 들지 않을것이니  만약에 된다면  이기회에  안동김씨를누르고 풍양조씨가  판세를 잡을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거렇게 하마고 밀약을 하였던것이다

 

 

 

드디어 익종의 양자로 맏아들은 나이가 많다하여  12 살인 차남 명복이 들어가서 왕이된다--   바로 26대 고종이다


이럴때를 대비하여 이하응은 비밀리에 명복을 양반법도와 궁중법도와 임금으로서 자세   신하를 부리는법 등을 가르치고 왔던것이다 


임금의 아버지가 된다  대원군이다.

 

대원군이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대원군으로 추존(追尊)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후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政)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인조 10)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했다. 또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全溪君: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의 아들)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趙氏:익종비, 헌종의 생모)의 명에 따라 흥선군 하응(興宣君昰應)의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4명의 대원군 가운데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져 '살아 있는 대원군'이라고 불렸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겉으로는 처음 몇년간은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왕의 아버지

곧 흥선대원군이 섭정(攝政)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

 

이로서 조선왕조 60 년간을 세도가들이 권력을쥐고 흔들던 시대가 막을내린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조대비도 결국 이하응의 계략에

손을들고 두 세도가들은 이하응 흥선대원군앞에 항복하게 되는데 

 

 60 년간을 지들 맘데로 했으니 나라 꼴이 말이아니였다

 

이것을 이하응은 아들을 앞세워 섭정을하면서 세도가들과의 기나긴 백성을위한 개혁의 전쟁을 하는데

흔히들 쇄국정치의 대명사로 흥선 대원군을 꼽으면서  나라의 흥망을 그의 그때문이라고 들 하지만

아니올씨다 이다....


그는 정말 왕권을 강화할려고 노력하였고 또한 백성들편에 서 정치를하였고 양반보다는 서민들을 위한 섭전을 하였다고

생각하며 그가 펼친 여러 정책들을 보면 정말 훌륭한것들이 많다.

 

60 년간의 세도정치 때문에 몰락한 시대를 개혁하는데

- 세도 가문을 박살냅니다 조선을 망하게한 그넘들을 차레차레 로....때려 잡습니다( 안동김씨가문앞에 무릅꿀으며 참아왔던 굴욕을 복수하듯)

- 양반패거리 중심축이였고 백성들의 피를빠는 온상인  대부분의 서원를 개박살 내버리고

   (모범적인 서원 47 개만 남겨두고 전국 600 여개를 없에버린다 )

- 만인평등으로세금을부과하는호포제실시,양반들도 세금을 내게 하고 ( 당시 양반들 특히 세도가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쳐 죽일넘들)

- 환곡제실시 

- 양전사업(토지조사) 을 실시하고 은결(숨겨둔토지) 색출하여

  전정을개혁하는등 을 등등..................

 

 

그는또 긴도포자락을 자르게하고 긴갓을줄이게하고  긴담배대도 짧게하는등 의식개혁에도 주저하지않고 서민들편에서 이룩했다

거러매도 불구하고  경복궁제건과 천주교신도박해 를 비롯해 병인양요, 신미양요, 며느리 명성황후 민비와 의 갈등 때문에

결국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집권과 실각(2차 집권 1882년 7월 25일~8월 26일, 3차집권 1894년 7월 23일~11월 21일)을 반복하다 말년에 축출당한다.

19세기 말 조선은 근대사회로 넘어가던 격동의 시대였다. 서양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했지만 조선 조정은 무능력했다.

그 무능의 조선을  다시 일어세울려고 그렇게 애를섰것만 뜻을 이루지못하고 거대한 바람앞에 밀려 밀려 권력을 손에서 내려 놓고 만다

 

 

말년에 그는 그가 좋아하던 난초그림만을 그리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1898 년 1월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사망하자

바로 2월  78세의 나이로 운현궁 별장인 아소당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죽은후에도 아소당뒷뜰에서 파주로- 다시 옮겨다니다가 3 번째야 이자릴 차지하게 된다 ----   풍운아 이하응 흥선대원군.....

 

아소당==나 자신을 비웃는다

            권력을 뺴앗기고 감금하다시피 있으니  얼마나 자신이 초라하게 드껴졌는지  별당 이름을 아소당이라 이름지었을꼬

            마포구 공덕동 에 있는 아소당은   지금은 아소정이란  이름으로  비빔냉면이 유명한 한식집으로 변해있다

             여기 음식 메뉴 중에는 특이하게  대원군수육 이라는것도 있다는데...


대원군에 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일화 하나---화양서원 몰매사건

                                     명나라황제 신위가있는 만동묘에 참배하러 갔다가 남루한 옷차림때문에 하인한데 몰매를 맞았다

                                    이에 이하응은 왕족을 때렸다고  서원을 관장하는 변장의에게 고하고 하인을 벌을줄것을 말하니  " 하인은 할일을 했을뿐' 이라고 일축하는데

                                    훗날 대원군이 되었을때는 문제의 그변장의는 대원군의 힘에눌려 맞아죽었다고 한다.

                                   ( 만동묘는 유림들의 거친 반발에도 물구하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박살이 나고 만다.......민족 자존심회복-단석 생각 )

 

 

일화 둘

                      안동김씨 수장인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도 수시로 이하응에게 모욕을 주곤하였는데 한번은 잔치집에 들어가 한상을 청하니  마침 거기에 있던 김병기가

                       " 상가집 개(대원군)한데 잔치한상은 호사다 " 하면서  자기가 먹던  고기뼈다귀를 이하응에게 던져 주었다.

                        이에 이하응은 그냥 웃고만 있었다는데

                     훗날 대원군이 되어 권력을 모두 잡은후 김병기의 잔치집에 나타나서는    음식을 먹던중 음식에 독이 들었다고 밷어버린다.

                      날으는새도 떨어트린다는 흥선대원군에 독이든 음식을 내 놨으니  김병기의 목숨은 바로 파리 목숨인즉...

                      새파랗게 질린 김병기는  밷어낸 이하응의 음식을 모두 주서먹어 독이 들지않았다는걸 보여주며 위기를모면한다.


                     이기지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훗날에      아들을 낳으면 김병기같은애를   낳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이하응이 거짓 파락호의 길를 걸으며 호시탐탐 정세를 살피고  안동김씨 들의 동태를 염탐하여  중간 연락병을 통하여 조대비한데 연락를취하고

                     인고의 날를 기다리며    기다릴때   아무도 이하응의 이 거짓 형세를 모르고 손가락질하며 넘어갔으나

                     딱 한사람  이 김병기가  의심을 하고 두 세번  이하응을 살피기도 하고 의중을 띄보는데

                       - 이보게 대감    대감은  임금이 될  생각은 없소  ?    있다면 우리가 밀어줄수 있는데

                        이에 하응은 들은체도 않으며 오히려 첫아들 공무원시험이나 좀 붙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김병기의 의심을 떨쿠어버린다.

                         훗날에 김병기는 가슴을치며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는일..............

 

일화셋

               이하응이 어려운시절 아무런 댓가도 없이  땔나무를 대주던 나무꾼이 있었다  훗날 대원군이 되어서는  양반들을 초청하여 연회를배푸는자리에

               대원군은 그 나뭇꾼을 불러 옆자리에 앉히곤 그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귀에다가 대고는  지금도 나무를 줄수있는냐고 줄수있으면 고개를

               끄덕여보라고 하니 고개를끄덕였다.   그리고는다시  귀에다 대고 자네 어머니를 나한데 수청들게 할수있는냐고 하니  나무꾼이 놀라 고개를 가로 져었다

               몇번을 거러니 매먼 고개를 가로졌던 나무꾼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는데.

              이튿날---- 나무꾼의 집앞에 한보따리씩의 뇌물을 가지고 들락거리는 양반들이 수두룩했다.  대원군의 부탁에 고개를 저어버리는 사람이라면

              대단한 측근이라고  지래 짐작을 하고 나무꾼에게 아부를할려고 재물을 바쳤던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자기돈 한푼 안들이고 나무꾼에게 보은한셈.

 

 

대원군묘에서  가족묘지로

 

일화 넷

              청나라사신이 왔다  대원군이 안내를하는데  경복궁앞에서 청 사신이 묻는데  " 이거 짓는데 얼마나 걸렸소 ? "

             약 3년정도 걸렸다고 답하자  청사신은  " 이정도면 우리나라면 1년이면 다 짓소 "  라고 하면서 조롱한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보더니 또 묻는다 얼마나걸렸나고  " 한 1년정도 걸렸소 "  라고 하자 청사신은 이정도면 우리는  몇달이면 다 짓는다고 약을 올린다

              다음으로 숭례문에 이르르자 청사신이 또 질문을하자  대원군이 대답하길   "   이거 오늘아침에도 없던거요 "   ㅎㅎㅎㅎ

 


일화 다섯

               그런 이하응이 젊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몰락한 왕족으로 기생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기생 춘홍의 집에서 추태를 부리다 금군 별장(종2품 무관) 이장렴이 말렸습니다.

                 화가 난 이하응이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일개 군관이 무례하구나!"
                 그러자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한 나라의 종친이면 체통을 지켜야지.이게 무슨짓이요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외상술이나 마시며 왕실을 더럽혀서야 되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습니다. 이장렴은 부름을 받자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에게 유언까지 했습니다.
                이장렴이 방에 들어서자 흥선대원군은 눈을 부릅뜨면서 물었다                "자네는 이 자리에서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이에 이장렴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대감께서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못된 술버릇을 갖고 있다면     이 손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장렴의 말에 흥선대원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조만간 그 술집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자네 때문에 안 되겠군."
                그리고 자기 오른손으로 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좋은 인재를 하나 얻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장렴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친히 문밖까지 나와 배웅을 하고선.   그리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금위대장 나가시니 앞을 물리고,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구두로 먼져 임명장을 수여한다


               금위대장이  성안의 문을 지키는 수장이므로 지금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관,경호실장쯤...  것보다는 금위대장으로치면 제일 믿을수있는 측근이여야 함이

               중요하거늘   대원군이 신임하니  끗빨또한 엄청 났겠지

                만약에 운현궁으로 불려간 이장겸이 쫄아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면 어케 됬을까....  아마도 뺨을 때린것이 사적인것으로 결론되어 살아남지못햇을거임.


               금위대장훈련도감, 어영청대장과 같이 도성을 방어하는 삼군문의 지휘관으로 중앙군사력의 핵심 군영을 담당하였다.

               금위영은 도성의 방어 외에도 궁궐의 숙위와 국왕의 행행 수가군(隨駕軍)을 담당하였다.

               국왕의 행행에서 금위대장은 도성에 남아 방어를 책임지는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거나, 행행의 호위를 담당하는 수가대장(隨駕大將)을 맡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금위대장은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력을 좌우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 임명권을 두고 국왕과 신료들 사이에 이견이 있기도 하였다.


이씨조선 마지막 왕손들 가족묘

혼유석한번 거창하구만.....(ㅇ혼유석 : 영혼이 찾아와 놀도록 설치한 돌).

 

조선이 기울어 쪽바리들과 외세가 판을 쳤듯이 여기 장명등도 따라 기울어져 있다

 

누가 조각했는지 생긴것 하고는...( 단석만의 생각으론  쪽바리의 장난이거나 아니더라도 어떤 고의성이 다분이 엿보인다 )

 

 

 

대원군 장남 흥친왕   고종의 형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죽음을 동생인 고종에게  고의로 알리지않았던    물에물탄듯 술에술탄듯 한 허리멍청한 넘이라고 평한다

민비의 이간으로 고종과 갈등으로 사이가 안좋을때 대원군이 장남 이분을 왕으로 앉힐려고 하다가 박각되어 실패로 끝나게되고..

흥친왕 맏아들 즉 대원군 장손자 이준용  똑똑해 아껴  왕으로 옹립할려다 그 또한 실패...

 

 

 더럽게도 못 맹근 ..


가족묘지에서 대원군묘를본다

 

 

보소 대원이대감-

 

사람 살이가 참 재미있잔소

 

가짜 금관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해서

 

 

거런지

 

조선 왕조는 부모,형제끼리 살육이 난무했지요?

 

대원이대감

 

가야사지 불태우고

왕이 2명이나 나왔다만

마지막 왕이 되었지요?

 

외척 배척 할려고

거렇게 거렇게

고르고 고르고 골라

 며느리 삼았더니

 

그며느리한데 쫒겨 다녔지요?

 

ㅋㅋㅋㅋ

 

세상사 인간사 참 재미 있네요.

.

.

.

 

 

이하응 흥선대원군 묘를 뒤로하고  나는 패달을 힘껏 저으면서 빠져나온다-----

 

죽으면 다 헛것이여...............죽으면 다 헛것이여..................죽으면 다 헛것이여..........................죽으면 다 헛것이여................죽으면 다 헛것이여

 

 

 

삼거리 우측으로 하여 오던길로는 안가고 산넘어 갈련다

 

 

조안리로 떨어지는 다운길

 

마지막 여기를 날머리로 정하고  바로 북한강변 나무의자에 앉아 물한모금 마신다.       오늘은 점심도 거런채 돌아다녔다..

슬슬 배도 고파오고 집에 갈길이 먼데-----   오래만에 잔차를타다  보이-----------------벌써 --지는해가 시야를 가린다         서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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