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 타기

14727-----금곡------------홍,유릉55

단석 2014. 7. 28. 12:36



남양주-금곡홍,유릉55.gpx




 


더운 여름에는  조선왕릉에가면 시원함을 맛볼수있다   여느 계곡처럼  술처먹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도 없고  오랜 고송의 향기를맡으며

역사 를 짚으면서 권력의 허무함과  따라 인생의 참을 배우는곳이기도 하다

 

자릴 깔고 한숨을 돌리면서 보내는것이 시세말로 하면 곧 힐링이 아니겠나

오늘은 문득 생각난    여기 고종 과 명성왕후   순종 이 잠들고 있는 홍릉 , 유릉을 찾는다   관람료 1000 원  매주 월요일 휴관

 

 

따뜻한 날씨  맑다

 

조선왕릉 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 년 6 월 30 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제 되었다

 519 년 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 해 왔다

그리하여 42 기능 어느하나라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히 보존 되었다

 

조선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  기에 이르르며 이가운데 능이 42기 이고 원이 13기이며 묘가 64 기이다

조선 오앙족의 무덤은 무덤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 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의 왕족의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 라고 한다

 

42 기의 능 가운데 북한개성에 있는 제릉( 태조의 원비 신의완후의 능), 후릉 ( 정종과 정안왕후의능) 을 제외한 40 기 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 년이 넘는 한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있는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매표소 정면으로 잔차 거치대가 있어서 표 아가씨한데 부탁을 하니  혼쾌히 거러라 한다. 단 잠거고 가라.

하지만  가방에서 꺼낸 잔차 자물쇄 번호를 잊어먹었다...  이런.... 난감해 하는 날 보더니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안에다 맡겨란다

감사 함더----

 

 

홍릉가는길=--- 경치 좋고   공기 좋고

 

사진에는 없지만 곳곳에 연인들이 자릴 깔고 누워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둘째 아들 고종-

 

자손만대에 흥함이 있는곳과  왕이 되는자릴  두고  선택하라는 당대 최고의 풍수지쟁이 물음에  주저 없이 선택한  왕이 나온다는 가야산 절터..

흥선 대원군은 왕이 나온다는 터에  절을 불태우고 천리 먼길을 마다않고  아버지묘를 이장 하고선 호시탐탐  왕권 탈환을 노린다.

 

사대부 집안들의 그 멸시와 핍박을 견디면서... 특히 안동김씨

 

억지 억지가 가미하였던지  고종은 대원군의 섭령에의한 쇄국정책, 며느리 민비와 알력, 사대부들과 투쟁, 왜세의 침략...등등

끊임없는 회오리속에서 제대로 왕노릇도 못해보고 갔다..

 

그토록 갈망 하며  땅에 떨어진 왕권을 찾고자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이하응 흥선대원군도 여기서 얼마 안떨어진 마석 에 잠들고 있다

 

삶이란  결국엔  암것 도 아니다. 권려도 돈도 ---

 

연지     태두리는  하늘을 상징    가운데 원은 땅을 상징

 

 

 

 

 

 

 

 

아궁이

 

 

 

홍살문=신성한 지역을 알리는문   붉은 칠을 한  둥근기둥 2 개를 세우고  그위에는 살을 박아놓았다

 

배위====여기서 임금이 4 번 절하고 어도 로  신위 를 따라간다

 

참도  =  원래는 좌측어도가 없었는데  여기는 있다   아마도 고종때 변화된듯

           조선 어느왕릉에도 안보이는   2 개의 어도       먼 뜻인지 ?

            그리고 보통 일반왕릉의 참도는 전부 자연석을 깔아놓았는데  여긴 유독   인공석이다



 

조선 초, 중기 왕릉에 보면 석상도 없었는데..

 

 

 

중앙  귀신이 올라간다는  신계      좌 우측   왕이 올라가는  어계    소맷돌문양은 조선 초 중기에 비해  간결하다

 

 

갠적으로    왕릉 과 산세, 주변 에 비해 조화 를 이루지못하는 석상   크다고 존것이 아니니

 

 

 

우연의 일치?(고종황제, 백범 김구, 박정희. 노무현 대통령) 

 

1852(철종 3)~ 1919. 1. 21.

조선 제26대 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1863~1907 재위).

 

자본주의 열강이 침입하는 중에 재위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뒤 황제라 칭했고,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그의 독살설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 장례식날 3.1운동 )

 

대원군집권기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성헌(誠軒)·주연(珠淵). 아버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이며, 어머니는 부대부인 민씨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즉위 후 10년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섭정했다. 1865년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징수했다.

1866년 프랑스인 신부와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같은 해 7월에는 대동강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인들이 불태워버렸다.

 1871년 지방의 농민수탈 근거지였던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이해 4월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으로 봉건적 개혁정책을, 대외적으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왕권안정 및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꾀했다.

 

민씨집권기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으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정권은 왕비의 척족세력이 장악했다(→ 명성황후). 1875년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 운양호 포격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듬해인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탈피, 대외개방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한편 안으로는 개화정책을 실시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정책을 관장케 하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런 개화정책은 1882년 구식군인과 도시빈민들의 무장봉기를 낳게 하고, 대원군의 재등장을 초래했다.

민씨정권은 청 세력을 개입시켜 봉기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했다.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의 체결과 청군의 주둔으로 청에 더욱 예속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씨정권 타도, 청과의 관계 단절, 근대 자본주의국가 수립 등을 내걸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뒤 1894년 반제반봉건을 내세운 갑오농민전쟁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친일개화파·보수유생층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에 집권 개화파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홍범14조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했지만,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채 일본에 의존한 개혁으로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1895년 삼국개입에 따른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의병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은 붕괴되었다.

대한제국기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했다.

고종은 보수세력과 일부 개화파들을 끌어들여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하에 광무개혁추진했다.

 

 이것은 각종 제도개혁,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 등을 실시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승인받았다.

또한 일본은 이해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박탈과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이에 고종은 1907년(광무 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 쪽빠리 새끼들 쳐 직일넘)

1910년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 죽었다.

 독살설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저서에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능은 홍릉(洪陵)이다.

 

흔히 말하는 고종은 유약하다는 말이 맞는가 아니면.. 대한제국국권회복을 위해 몸부림치다 간 황제인가 ?

고종에 대한 평가는 그 빛과 어둠이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적어도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도포자락에서 숨거나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휘둘리기만 한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 격동기에 한나라의 군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격었다는건 엄년한 사실일것이다 내가볼적엔...

 

1896 년 2월11일  새벽, 고종과 황세자( 나중 순종) 가 두대의 가마를타고 궁굴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으로 이동했다

말이좋아 이동이지  토겼다는 말이 맞지비  일명 아관파천이다  후세 역사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머리아푸게 만든 아관파천

나도 이사건땜에 시험 몇번 망쳤다.  

 

그리고 갠적으로 맘에 안드는게  있는데  왜 가마타고 갔는냐 이말이다..

당년히 잔차타고 갔여야 했다.  하드텔 하나 장만해서 바람 탱탱히 넣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갈게 아니라

골목 골목 누비며 쪽빠리새끼들 쳐부술 의병을 모집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후세에 두고두고  어쩌니 저쩌니 평가를두고 시브리지않았을게 아닌가....

 

 

독일의 사진작가가 찍은 
Die Ermodete Konigin(살해당한 왕비)라는 주석이 붙어있는 사진
실제로 명성황후를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사진

1851(철종 2)~ 1895(고종 32).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

개요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대원군하야시키고 개국을 단행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청의 세력에 의존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국내정치에서는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행했으며, 일련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성장과정과 집권배경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1873년(고종 10)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다.

집권과 대외정책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더욱이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라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으로 성씨인 민씨와 조선시대 왕의 부인인 왕비를 축약해 부르는 용어이며,

시해된 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명성황후도 사고를보면 나오듯 명암이 엇갈린다.  특히 주목할점은 미신이나 점쾌에 접근을 많이하고 거기에 많은 국고를 낭비했다는것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심지가 곧으며 한편으로 나약하며 정이 많았다며 가까이접한분들의 증언이 있으나

암텀 이사람도 격동기에 한나라의 국모로서 수많은 갈등과 시련을 겪다 비명에 간 건 사실이다.

일일이 다 열거 할려니 머리 아푸고...  대충둘러보고 유릉으로 가야겠다

 

 

저기 잔디 중앙에 있는것이   어정

어정 = 우물

 

능침앞에 정자각대신 세운 침전   능침의 위용을 수그리게할만큼 너무 크다

나라가 망쪼가 드니 별것다 주물리고--  할려면 좀 제대로 하덩가   한마다로 여기는 죄다 불 조합적으로 보인다

 

비각=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두는곳  신도비는= 능 주인의 업적을 세겨둔 비석을 말한다

 

능침공간과  재향 공간 사이에 서다  ==  저 울타리를 넘으면 죽은자의 공간이고  앞쪽은   죽은자와 산자가  만나는곳이다

내 발을 잘 바라---- 난 지금 죽은자의 영역에 서있다.    코구명으로 숨쉬고 있는 산자가 죽은자의 자리에 있다?

 

 재향공간에 서서 죽은자의 공간 인  고종과 명성왕후  의 능침을 보면서...

한걸음의 차이를두고 명암이 엇갈린다.  죽은자와 산자  심장 소리가 들리는자와 멎은자,  잔차를탈수있는자와 없는자,

 

 

 왕들의  무덤이 산 능선을 따라 지세를 보고  잡는데  능침뒤로  산언덕이 있어야 하지만    앞에 보이는 저 문뒤는  산이 아니고  길이다

여기를 보고 산책길을 따라가보니  거리 하더라

 

 

 

 

침전과 비각의 추녀 끝은-

수줍은 아낙의 외씨버선 코같이

 

수줍다  수집어

살포시 들어 올린다.

 

고쟁이 아래로

하얀 속살을 비추며

 

나들이 온

늘건 라이더을 유혹하는데,

 

터지면 책임 질려나...??

 

 

 

 

홍릉에서 유릉 가는길     잔차를 타고 갈수 없는게 아쉽다.

 

 

유릉

 

 금천교 우측 재실

 

금천교(禁川橋)=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서 속세와 성역의 경계역할을 한다

금천교를 가로 지르는  개울이 이세상과 저 세상을  갈놓는 경계선   좌측은   귀신과 속세 사람이 만나는  제향공간

개울 우측은 이승 세계  즉 능참봉이 살고 있는 재실이 있는곳  진입공간  이다

 

 

 

 

 

유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다     유릉은 한 능침에 세명을 모신 동봉삼실 합장의 형태로 조영되어있다

즉 순종과  순명효황후 , 계후순정효황후

 

 

 

1874(고종 11)~ 1926.

조선 제27대 왕(1907~10 재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기간 동안 통치권을 통감부에 빼앗기고, 일제의 강요로 한일신협약·기유각서·한일합병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고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다. 즉위 후 일본의 강요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차관이 국정 전반을 간섭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어 일제는 재정부족의 이유를 들어 군대를 강제 해산했으며,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정치·외교·군사·경제·사법권 등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일진회를 앞세워 합병을 추진하여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무너지게 되었다.

 

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 1926년 죽었다.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조선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다

 

 

 

여전히 문관이 먼져 무관이 뒤에-  가설컨데  무관이 앞섯다면 열강의 회오리속에서 살아남았을까...  하는의문

 

 

 

 

여기서도 소맷돌이 너무 간결하고 단조롭다.  그래서 거런지 아름답다기보담  성의없어보인다

 

 

 

비각--  아마도 뒷면에 순종에 대한 업적이 뺴곡히 적혀 있을터..

 

신도 어도 외  일반 신하들이 가는길

 

유릉 재실

 

마당에 두줄로 된 길이 ... 의미를  ?

 

재실 뒷뜰

 

 

 

어정=  우물

 

 

곡간

 

창고

 

좌측 공간과 우측공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는 저것은 .... 너무 아름답다

 

작은 박물관 내부

 

 

 

 

정면---홍유릉가는길   우측--영원 덕혜옹주, 의친왕릉 가는길  담장 외부 산책길이라  잔차타고 갈수있다

 

홍릉,유릉 능침뒤로 있는 산책길

 

 

 

 

 

서늘한 숲속을 기어비 1대 2로 하면서 어설렁 어설렁~~~~

 

산책길 마지막 운동기구 있는곳   약수터

 

의친왕릉

 

오늘은 여기서 끝네고 담엔 홍유릉을거처   백봉산 싱글을 타고 마석으로가서 흥선대원군 묘를 찾고  북한강변  잔차길을 따라 돌아올것이다

 

왕이면 머 할것이여-------------살아 있어 잔차타고 있는내가 제일이제......

 

 

 

남양주-금곡홍,유릉55.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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